http://cafe.daum.net/dos1130 黃汝一 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 정도령
http://cafe.daum.net/dkdehd63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이조(李朝) 선조(宣祖) 때 명(明)나라의 사신(使臣)인 찬획주사(贊획主事)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이다.
그 정응태 사건의 개략을 보면,
정응태는 조선(朝鮮)의 왜란 중에, 명(明)의 황제(皇帝)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의 요지는, 명(明)나라 조정이 요동(遼東) 땅을 빼앗아 탈취하고 있는데.
이 요동(遼東) 땅은 옛 고구려(高句麗) 땅이어서 조선(朝鮮)이 다시 회복(回復)하여야 한다면서,
조선(朝鮮)이 왜병(倭兵)을 불러들여 함께 명(明)나라를 치려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朝鮮)에 파견되어 명(明)나라 군사를 지휘하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사당(私黨)을 만들어서
조선의 임금과 신하(臣下)들과 결당(結黨)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속이고 대적(對敵)한 지가 여러 해인데,
그 증거로서 조선(朝鮮)의 오래된 책인 해동기략(海東記略)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을 다녀오면서 왜인(倭人)에게 우연히 책 한 권을 얻어서 보니,
그 나라(倭)의 풍속과 세계지도(世界地圖)를 기록(記錄)하고 있는 왜인(倭人)이 저술(著述)한 책으로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만든 책인데,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 나라에 있는 관(館)과 일본과의 관계를 사례별로 기록한
책을 한 권 만들었으니, 그 책 이름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인 것이다.
정응태는 이 책을 보고 인용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를 무고(誣告)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日本)의 연호(年號)는 큰 글씨로 쓰고,
큰 글씨로 쓴 일본(日本)의 연호(年號) 하단 부분에,
조그마한 글자로 명(明)나라의 연호(年號)를 썼으며,
또한 분수에 지나치게도 태조(太祖), 세조(世祖), 열성조(列聖祖), 성상(聖上)이라 하는 용어는
천자국(天子國)에서만이 쓸 수 있는 용어(用語)인데, 어찌 제후국인 조선(朝鮮)이 함부로 쓰고 있는가?
본보기로 주색(酒色)에 빠지고 횡포가 잔인한 조선(朝鮮) 국왕과 신하들을 문책(問責)하여야 하며,
어찌 감히 일본을 끌어들여 명(明)의 조정을 우롱(愚弄)하는가?
양호(楊鎬)와 더불어 결당(結黨)한 이 무리들이 황제를 기만(欺瞞)하였으니,
황제께서는 너그럽고 관대함을 거두시고,
조선(朝鮮)을 토벌하여 제거(除去)하여 버리라』 고 극언(極言)했던 것이다.
『조선(朝鮮)이 쌀과 곡식과 비단 등을 일본에 헌납(獻納)하였으며,
또한 일본과 조선(朝鮮)이 서로 사신(使臣)을 왕래(往來)하여 일본을 불러들여,
옛 고구려(高句麗) 땅을 회복하려고 쌀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허언(虛言)이 아니라』 고 한 것이다.
그러한 내용이 명(明)나라 황제(皇帝)에게 전해졌으니,
명(明)의 황제와 명(明)의 조정(朝廷)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 우리 나라의 실정은, 일본과의 오랜 전쟁에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명(明)나라 조정에서 정응태의 글을 그대로 인정하여 우리 나라를 토벌한다면,
우리의 국운(國運)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인 것이다.
이 때에 조선(朝鮮) 조정에서는, 이 말이 진실이 아님을 변명(辨明)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야만 했는데,
평상시에 보내지는 사신(使臣)과는 근본적으로, 그 임무(任務)가 다른 엄청난 사건인 것이었다.
그 때 당시 명(明)나라의 사정을 보면, 대내적(對內的)으로 양응덕(楊應德)의 난(亂)이 있고,
조선(朝鮮)이 왜란(倭亂)을 당하여서 어쩔 수 없이 구원병(救援兵)까지 보내 주어 국력(國力)이 매우 약해져
있을 때에 이러한 글이 황제께 전해지니, 여러모로 조선(朝鮮)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朝鮮)의 조정에서는 나라의 안위가 위급(危急)함에 이에 대처(對處)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苦心)을 하였겠는가?
크게 고심한 끝에, 그 당시 문장(文章)으로 가장 총망받는 사람을 가려 뽑아서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에,
정사(正使)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우의정)이,
부사(副使)로는, 월사(月使) 이정구(李廷龜) 선생(이조판서)이,
서장관(書狀官)으로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해월(海月) 선생이 뽑히게 되어,
10월 21일(癸酉)일에 서울 서소문 모화관(慕華館)을 출발하게 되었다.
11월 10일 아침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으며,
12월 6(丙辰)일 압록강을 건넜다.
1599(선조32년, 己亥)년 1월 23(甲辰)일 비로소 북경에 도착하여 황성(皇城) 동문(東門)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 당시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로 가는 사신(使臣)들의 입장은,
이 문제(問題)를 깨끗하게 아무런 오해없이 해결(解決)하지 못하고는,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절박(切迫)한 입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사신(使臣)들이 명(明)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조선(朝鮮) 국왕의 주문(奏文)에는,
주권(主權)을 가진 나라로서는 차마 밝히기가 거북한 내용(內容)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첫 문장(文章)에 조선(朝鮮) 국왕은 이와 같이 오명(汚名)을 입게 되었으니,
삼가 석고대명(席藁待命), 즉 거적을 깔고 업드려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며, 용서를 간걸(懇乞)한다고 하였다.
또한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명(明)나라 정부의 오부(五府), 육부(六府), 구경(九卿), 육과(六科), 십삼도(十三道)의 관청을 두루 찾아다니며,
우리 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기록한 주문(奏文)을 제출(提出)하고는 우리의 억울(抑鬱)함을 토로(吐露)하였다.
2월 5(乙卯)일 동궐(東闕)에서 어전회의가 있었는데,
동궐(東闕) 출문 밖에서 우리 나라 사신(使臣) 일행(一行)이 그 계단 앞에서 나아가 꿇어 업드려 절을 하며,
우리 나라의 원통(寃痛)한 일을 설명하였다.
이 때 소대형(蕭大亨) 형부상서(刑部尙書)가 업드려 있는 우리 사신일행(使臣一行)을 보고,
사람을 시켜서 일어나게 하였으며, 업드려서 절(拜禮)를 하지 말고,
다만 양읍(兩揖)만을 하라고 하자, 다시 일어나 양읍(兩揖)을 하고는
다시 나아가 업드려 절을 하며 억울(抑鬱)함을 밝혔다고 한다.
또한 예부조방(禮部朝房 : 朝臣들이 朝會 때를 기다리며 모여 있던 방, 대궐 문 밖에 있었음)
문밖에서 좌우(左右)로 나뉘어 서 있다가 계단 아래로 나아가, 두 번 절을 하고
또한 읍(揖)을 한 다음 무릎을 꿇고 나아가 글을 올리며 이른바 진정을 하였다(行兩拜作損因跪呈咨文).
이 때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郞) 여계등(余繼登)이 크게 불평을 말하며,
우리 사신(使臣) 일행(一行)에게 이르기를 퇴거(退去)하라고 지시(指示)하여,
감히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고 하였다(不敢開說而退仍).
이 기록(記錄)을 통하여 약소국가(弱小國家)의 설움을, 해월(海月) 선생은 뼈저리게 느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사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25일(乙亥)일 병부(兵部)에서 보내 온 공문서인
자문(咨文)에는, 우리 나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있었으나 마침내는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사(上使)였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같이 갔던 사신(使臣) 일행(一行)들과 어려웠던 상황에 대하여 주고 받은 이야기를
『二十八日(이십팔일) 將往兵部(장왕병부) 余出言曰(여출언왈) 此大事(차대사)
月沙以爲(월사이위) 必無不成(필무불성)
李譯以爲(이역이위) 必不成(필불성) 必有害(필유해)
吾以爲(오이위) 必不成(필불성) 亦無害(역무해)
獨書狀(독서상) 無決語(무결어)
行示?白(행시?백) 且觀吾儕先見如何(차관오제선견여하)
海月曰吾意與上使同(해월왈오의여상사동) 仍詣兵部(잉예병부) 見蕭尙書呈文(견소상서정문)
且陳其由則尙書曰(차진기유즉상서왈) 聖旨不於前議准下(성지불어전의준하)
而只於後議准下(이지어후의준하) 不敢以前議成咨(불감이전의성자)
吾等退出外庭(오등퇴출외정) 余行且顧月沙(여행차고월사)
獻之曰(헌지왈) 吾不云乎(오불운호) 今竟(금경) 如何(여하)
尙書笑言(상서소언) 一一與吾言(일일여오언) 妙合(묘합)
今日方知(금일방지) 公騷陞之害也(공소승지해야) 恨不習吏事(한불습리사)
月沙笑曰(월사소왈) 上使不以不成爲念(상사불이불성위염) 而反以先見(이반이선견) 爲行耶(위행야)
海月公曰(해월공왈) 我亦云如此(아역운여차)
衆皆斥之曰(중개척지왈) 因人成事(인인성사)
海月曰(해월왈) 託以叩謝非吾策耶(탁이고사비오책야)
余曰(여왈) 此則當以公爲盟主(차즉당이공위맹주)』
2월 28(戊寅)일 병부(兵部)로 가면서 내(白沙:이항복)가 말하기를 ‘이는 큰일(大事)입니다.
월사(月沙, 李廷龜:이정구)는 이 일은 틀림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언화(李彦華) 역관(譯官)은 반드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해(害)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내(白沙) 생각에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해(害)는 없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오직 서장관(書狀官) 해월(海月)만이, 아무런 결연한 말이 없으니,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의 상황(?白: 옳고 그른 시비)을 밝혀 주고,
또한 우리 일행(一行)들의 선견(先見)이 어떠한지도 보아 주기를 바라오‘ 하니
해월공(海月公)은 내(海月) 뜻은 상사(上使)와 같으므로,
이에 병부(兵部)에 나아가서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을 만나 뵙고 글을 올리며그 연유를 진정한즉,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이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뜻(聖旨)이 앞서의 논의(前議: 우리나라의 입장)는 비준(批准)하지 않고,
후의 논의(後議: 뇌물을 주어 왜(倭)를 끌어들였다는 주장)만을 비준(批准)하였는데,
어찌 감히 천자(天子)가 비준(批准)하지 않은 앞서의 논의(前議)를 공식(公式) 문서(文書)로 작성할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고 했다.
우리 일행(一行)들은 바깥의 뜰로 나와서 가다가 내(白沙)가 월사(月沙)를 돌아보며 농담삼아 말하기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경우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형부소상서(刑部蕭尙書)가 하는 말이 일일(一一)이 내 말과 묘하게 부합(符合)하지 않는가?
금일에 바야흐로 그대(月沙)의 관직이 갑자기 오른 것이 해(害)가 됨을 알겠으니,
그대가 관리의 일(吏事)을 익히지 못했음이 한(恨)스럽다.’ 했더니,
월사(月沙)가 웃으면서
‘상사(上使)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괘념치 않고 오히려 선견(先見)이 맞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십니까?’ 라고 말했다.
해월공(海月公)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다(衆皆) 그렇지 않다고 말을 막으며(斥),
인인성사(因人成事: 즉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서 일이 성사된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이에 해월공(海月公)이 말하기를
‘공손히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부탁한 것이지 달리 나의 비책(秘策)이 있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내(白沙)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큰 일은 당연히 그대 해월공(海月公)이 맹주(盟主: 동맹의 주재자)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백사(白沙) 선생이 해월(海月) 선생을 왜 맹주(盟主)라고 했는지를 알려면,
인인성사(因人成事)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사기(史記)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나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진(秦)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하였을 때,
조(趙)나라는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합종(合從)을 하고 구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합종(合從) :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함. 초(楚)와 조(趙)나라가 동맹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하자는 의견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그의 문하(門下)에 식객으로 있는 이십인(二十人)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문사와 말로써 승리를 얻을 수 없다면 궁궐 안에서 초(楚)나라 왕을 협박(脅迫)하여 피를 나누어 마셔서라도 반드시
합종(合從)을 정하고 돌아오겠다.
선비는 다른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 문하(門下)의 식객 중에 골라도 충분하다.’
그리고는 19명을 골랐는데 그 나머지 한 명은 알맞은 사람이 없어서 채울 수 없었다.
이 때 문하(門下)에 모수(毛遂)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平原君)에게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며 데려가 주기를 청했다.
평원군(平原君)이, 대저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처하는 것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서 그 끝이 즉시 밖으로 나타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며,
3년 동안 있었다는 데도 모수(毛遂)에 대한 칭찬을 한 번도 못 들었으니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그러자 모수(毛遂)는 일찍부터 모수(毛遂) 자신을 주머니 속에 처할 수 있게 했다면 송곳의 머리까지 튀어
나왔을 것이요, 그 끝만 빠져 나오는 정도에 불과(不過)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모수(毛遂)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다른 19명은 처음에는 모수(毛遂)를 비웃었으나,
초(楚)나라로 가면서 토론을 하고는 모수(毛遂)에게 설복 당하였다.
평원군(平原君)이 초(楚)나라 왕과 더불어 합종(合從)을 하는데,
평원군(平原君)의 끈덕진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이해(理解)를 따지느라,
해가 뜰 때 시작한 토론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19명이 모수(毛遂)더러 나서 보라고 하자,
단 아래에 있던 모수(毛遂)는 검(劒)을 잡고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가,
평원군(平原君)에게 합종(合從)의 결과는 두 마디면 결정(決定)이 날 것인데
어찌하여 결말(結末)을 짓지 못하는지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초(楚)왕이 주인(平原君)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데 왜 나서냐며 꾸짖었다.
이에 모수(毛遂)는 검(劒)을 부여잡고 앞으로 다가서며,
왕께서 나를 꾸짖고 큰소리 치는 것은 초(楚)나라의 막강한 군사의 힘을 믿고 하는 짓이외다.
그러나 지금 나(毛遂)와 왕과의 거리는 십보에 불과하여,
막강한 군사(軍士)의 힘을 믿을 수 없으니,
왕의 목숨은 모수(毛遂)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주인이 앞에 있는데 자기를 꾸짖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한 탕(湯)왕과 문(文)왕이 제후를 신하로 둔 것이 사졸(士卒)이 많아서가 아니며,
초(楚)나라 땅이 사방 천리이고
백만(百萬) 군사를 가진 초(楚)나라의 힘을 천하에 감히 대적(對敵)할 나라가 없다며
저 진(秦)나라의 백기(白起)란 놈은 작은 더벅머리에 불과하지만,
한 번 싸워서 언(鄢)과 영(郢)을 점령하고,
두 번 싸워서 이릉(夷陵)을 불태우고,
세 번 싸움에 왕의 부왕(父王)을 패배시켜 치욕을 안겨주지 않았소이까?
이것은 씻을 수 없는 백대의 맺힌 한(恨)이라.
조(趙)나라의 수치로 여기는 바이다.
그렇다면 합종(合從)과 동맹(同盟)은 사실상 초(楚)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趙)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대들며 조리(條理)있게 따졌다.
『王曰(왕왈) 唯唯(유유) 誠若先生之言(성약선생지언) 謹奉社稷以從(근봉사직이종)
遂曰(수왈) 取鷄狗馬之血來(취계구마지혈래) 捧銅盤(봉동반)
詭進曰(궤진왈) 當?血以定從(당?혈이정종) 次者吾君(차자오군) 次者遂(차자수)
左手奉盤(좌수봉반) 右手招十九人(우수초십구인) ?血於堂下曰(?혈어당하왈)
公等(공등) 碌碌(녹녹) 所謂(소위) 因人城事者也(인인성사자야)
平原君(평원군) 定從歸(정종귀)
曰毛先生(왈모선생) 一至楚(일치초) 使趙(사조) 重於九鼎大呂(중어구정대려) 以遂(이수) 爲上客(위상객)』
초(楚)왕은 모수(毛遂)의 말을 듣더니, 과연 그렇도다. 듣고보니 선생의 말이 사리에 맞는도다.
삼가 사직(社稷)을 받들어 그대의 말에 따라 동맹(同盟)을 맺으리라고 말했다.
이에 모수(毛遂)는 닭과 개와 말의 피를 가져 오도록 하였고,
피를 담은 동반(銅盤)을 받들어 무릎을 꿇어 엎드리면서,
왕께서 맹약(盟約)의 주인공으로서 먼저 피를 마십시오.
다음은 우리 임금이요,
다음은 이 모수(毛遂)가 먹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피를 마시고 나서, 왼손에 쟁반을 들고 오른손으로
19명의 동반자를 불러 전당 아래에서 피를 마시게 하면서,
그대들은 작은 돌모양으로 주관(主觀)이 없이 남을 추종(追從)하는 쓸모없는 존재(存在)로다.
이른바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여 일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라고 말하였다.
평원군(平原君)은 동맹(同盟)을 약정(約定)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모(毛) 선생이 한 번 초(楚)나라에 가 주신 덕분에,
조(趙)나라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도 더 존중(尊重)받도록 만들었다며,
모수(毛遂)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구정(九鼎 : 하, 은, 주의 3대 보물)
대려(大呂 : 周왕조의 큰 鍾으로 周왕조의 보물)
초(楚)나라와의 동맹(同盟)이 체결되지 않으면,
조(趙)나라의 사직(社稷)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난항(難航)을 겪고 있던 초(楚)나라와의 동맹(同盟)을 이루어낸 것은, 결국 모수(毛遂)인 것이다.
평원군(平原君)을 따라간 20명의 식객 중 학문(學文)과 무예(武藝)를 겸비해서 먼저 뽑힌 19명은 동맹(同盟)을 맺는데
실질적(實質的)인 일을 하지 못하고, 모수(毛遂) 혼자 동맹(同盟)을 성사(成事)시켰으니
모수(毛遂)의 힘에 의지하여 일이 이루어진 것을 일러, 인인성사(因人成事)
즉 남을 의지하여 일을 성사시킨 것이라고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월(海月) 선생과 같이 갔던 일행들 모두가 인인성사(因人成事)라는 말을 인용(引用)하여,
그 당시의 대사(大事)는 해월(海月) 선생 혼자의 힘으로 해결(解決)한 것이라고 말하니,
백사(白沙) 선생도 당연(當然)히 이 일에 있어서는 해월공(海月公)이 맹주(盟主)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해월(海月) 선생의 은사일록(銀槎日錄)을 보면,
당시 명(明)나라 조정(朝廷) 관리들이 우리 조선(朝鮮)을 보는 시각(視覺)과 관점(觀點)이 어떠했는지를,
각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의견(意見)을 하나하나 들어 기록(記錄)하고 있다.
당시에 명(明)나라 조정(朝廷) 안에서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비판적(批判的)인 시각(視覺)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명(明) 조정에서 우리 나라에게 우호적(友好的)인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을
해월(海月) 선생이 찾으니,
소대형(蕭大亨)은 조선(朝鮮)이 올린 문서(文書)를 회의(會議)에서 통과시키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되지 않으니,
이러이러한 사람에게 이 내용을 알려서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해월(海月) 선생은 이미 그들에게 전(傳)했다고 하였다.
해월공(海月公)이 뛰어난 문장력(文章力)과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사실상 거의 혼자의 힘으로 이 사건을 처리한 것을, 백사(白沙) 선생은 그의 문집(文集)에다 밝혔던 것이다.
당시 해월(海月) 선생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던 사람들 중,
우리 나라를 도왔던 우호적인 인사들을 든다면,
심 각로(沈 閣老: 재상), 조 각로(趙 閣老), 태학사(太學士) 조지고(趙志皐), 이부상서(吏部尙書)
이대(李戴), 호부상서(戶部尙書) 양준민(楊俊民), 형부우시랑(刑部右侍郞) 동유(董裕),
공부상서(工部尙書) 양일괴(楊一魁), 통정사사(通政司使) 범륜(范崙), 이부도급사중(吏部都給事中)
조완벽(趙完壁), 호부도급사(戶部都給事) 포현첩(包見捷), 예부좌급사(禮部左給事) 유여택(劉餘澤),
병과도급사(兵科都給事) 장보지(張輔之), 계유근(桂有根)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 양응문(楊應文),
공부도급사(工部都給事) 한학신(韓學信),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 등등이었다.
그 당시 소대형(蕭大亨) 형부상서(刑部尙書)가 가장 앞장 서서 우리 나라 입장을 지지(支持)해 준 분으로,
명(明)나라 조정에서도 실세(實勢)로 아주 돋보이는 분이라고 해월(海月) 선생은 밝히고 있다.
또한 당시 우리 나라 역관(譯官)인 이언화(李彦華)가 해월(海月) 선생을 가장 많이 도왔던 것이다.
그 당시 해월(海月) 선생은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에 가서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해월(海月) 선생은 우리 나라의 입장을 명(明)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혼자 수많은 조정(朝廷) 관리들과 접촉하고, 우리의 입장(立場)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만나서 그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의견과 인상을 자세히 기록(記錄)으로 남겨 두었는데,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2권에 자세(仔細)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사실 해월(海月) 선생은 명(明)나라 조정(朝廷)의 여러 관청을 다니면서,
진정서(陳情書)를 전달하고 우리 나라의 무고(誣告)를 진설(陳設)하고, 통변(通辯)하자,
각로(閣老: 재상)와 고위관리(高位官吏)들은, 그의 언변과 논술(論述)이 분명하고 예절바른 태도에 모두들
감탄하고는 다투어 서로 차와 술을 대접하며 나라의 치욕(恥辱)을 벗겨 줄테니,
공(公)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慰勞)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신(使臣) 일행(一行)은 곳곳에서 연회(宴會)의 초청(招請)을 받았지만,
우리 임금의 오명(汚名)을 씻기 위하여,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로 갔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의 예부(禮部)에다 연회(宴會)에 초청(招請)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는
면안정문(免晏呈文)을 제출하였다.
멀리서 온 사람을 받들어 위로(慰勞)하며, 지극히 성대(盛大)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니 그 은혜가 도탑지만,
고국(故國)을 떠나올 때 임금이 가슴을 치고 침식(寢食)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며,
군신상하(君臣上下)가 몹시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고 있는 이 때에,
어찌 신(臣)만이 홀로 고맙게 베풀어 주는 잔치를 즐길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간곡(懇曲)한 내용의 글로,
예부(禮部)에서 연회(宴會)의 초청을 금하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문서를 2월 5(乙卯)일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당시 명(明)나라의 관상가(觀相家)가 조선(朝鮮)의 사신(使臣) 일행 중 해월(海月) 선생을 가리키며,
『時相者來(시상자래) 使行(사행) 指先生曰(지선생왈) 黃書狀生於東國(황서장생어동국)
稟得萬里氣像(품득만리기상) 甚可異也(심가이야).
在座人曰(재좌인왈) 書狀生於東海(서장생어동해) 世居小國(세거소국)
何以稟得萬里氣也(하이품득만리기야)
相者曰(상자왈) 信不誣矣(신불무의). 稟生東海之氣(품생동해지기)
書狀之量(서장지량) 河海弘量矣(하해홍량의) 嘖嘖稱歎(책책칭탄)』
.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지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라고 하자,
함께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해(東海)에서 태어나 대대로 소국(小國)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상가(相者)가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동해(東海)의 기(氣)를 받고 태어난 서장관(書狀官)의 도량(度量)은 하해(河海)와 같은 분입니다.’ 라며
큰 소리로 탄복(歎服)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에 따른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家門)에는 전(傳)하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 당시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명(明)의 신종(神宗) 황제도 해월(海月) 선생에게
‘조선(朝鮮)은 삼천리(三千里) 강토(疆土)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서 명(明)을 치려 하느냐?’ 라고 물었다 한다.
만일 여기서 바로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머뭇거린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허사(虛事)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커다란 재앙(災殃)이 되는 위급(危急)한 상황(狀況)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朝鮮)이 일본(日本)과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찾겠다는 오해(誤解)로 인(因)하여
명(明)의 황제 앞에 해명(解明)하기 위해 갔는데 말이다.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하였다.
‘예 신(臣)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絶妙)하고 적절(適切)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종(神宗) 황제는 무릎을 치면서,
‘조선(朝鮮)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이름이 지어져 「너 하나밖에 없다」 는 뜻의 「여일(汝一)」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해결하고 귀국하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동해(東海)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馬嶽山) 중턱에다, 거주(居住)하고 있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正南向)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理由)는 명(明)의 조정에서 조선(朝鮮)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황제(皇帝)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몇 십년 뒤에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되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그 잔해가 아직도 간혹 나오고 있다고 후손(後孫)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해월(海月) 선생이 명(明)나라에서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형부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이 이르기를,
명(明)나라의 군대가 조선(朝鮮)에 오랫동안 파견되어 있지만,
명(明)나라 조정 역시도 서쪽의 적(敵)과 북쪽의 오랑캐 때문에 근심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니 속히 조선(朝鮮)에 파견되어 있는 군대를 철수(撤收)하여야만 할 입장이니,
조선(朝鮮)은 명(明)에만 의지(依支)하지 말고, 스스로 강(强)해져서 자립하라고 하였다(自强自立).
1599(선조 32년, 己亥)년 3월 18(丁酉)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4월 24(癸酉)일 압록강을 건너고, 4월 25(甲戌)일에 의주에 머물렀다.
윤 4월 기해(己亥)일에 복명(復命)을 했다.
이처럼 해월(海月) 선생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理由)를 잘 대변(代辯)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士之享大名顯當世者(사지향대명현당세자)
莫不有先達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前焉(막불유선달지사부천하지망자위지전언)
士之能垂休光照後世者(사지능수후광조후세자)
亦莫不有後進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後焉(역막불유후진지사부천하지망자위지후언)
莫爲之前(막위지전) 雖美而不彰(수미이불창) 莫爲之後(막위지후)
雖盛而不傳(수성이불전 )』
선비(士)로서 명성(名聲)을 올려 그 시대(時代)에 유명하게 된 자는,
그 사람보다 선배(先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갖고 있는 자가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는 일은 없고,
또 선비(士)로서 뛰어난 공적(功績)을 남겨 후세(後世)까지 명성(名聲)을 나타내는 자는,
그 사람의 후배(後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얻고 있는 자가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는 자가 없다.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으면, 후배(後輩)는 아무리 아름다운 재주와 덕(德)을 지니고 있어도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고,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으면,
선배(先輩)의 사업이 아무리 성대(盛大)해도 후세(後世)에 전해지지 않는다(不傳).
그 당시의 세분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세 분이 서로 시가(詩歌)나 문장(文章)을 주고 받은 글들이 주옥(珠玉)같이 남아 있는데,
그 문장(文章)에는 그 덕(德)과 기상(氣像)이 가히 존경(尊敬)하고 숭배(崇拜)할만 하다고 하며,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兩沙遺稿(양사유고) 刊行已久(간행이구)
遍滿東國(편만동국) 殆家有人誦(태가유인송)
而海月之文(이해월지문) 尙湮晦無傳(상인회무전)
豈非(기비) 吾党之所(오당지소) 可慨然者那(가개연자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의 유고(遺稿)는 이미 간행(刊行)되어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유독 해월(海月) 선생의 글만이 오히려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전(傳)해지지 않으니,
어찌 우리들이 이와 같이 편파(偏頗)적인 일을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발문(跋文)을 쓰신 것이다.
또한 발문(跋文) 속에 해월(海月)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故其發爲詞藻(고기발위사조) 文華者(문화자) ?拔特達(?발특달)
汗瀾不可以涯?(한란불가이애?)
詩尤精麗(시우정려) 爾雅??(이아??)
有唐宋人(유당송인) 聲氣(성기)
諷詠遺什(풍영유십) 於曠世之下(어광세지하)
猶可象想(유가상상)
其襟靈爽朗(기금영상랑)
器量涵泓(기량함홍)
直與滄海明月(직여창해명월)
輝映?澈(휘영?철) 同流(동류)
其光影者(기광영자) 抑何奇也(억하기야)』
즉 그의 시문(詩文)을 짓는 재주를 말하자면,
그의 문장(文章)은 여러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연 뛰어나서,
한 번 물결이 일면, 그 끝간 데를 알 수 없으며,
그의 시(詩)는 더욱 정묘하고 고우니(精麗:정려), 문장이나 언어가 아름다우며(爾雅:이아),
말(馬)이 빨리 달리는 것과 같아서(駸駸:침침)
당송(唐宋)인의 득의(得意)한 마음이나 기개(氣槪)를 볼 수가 있으며,
지금까지 전해진 문집(文集) 속에 있는, 그의 시(詩)를 읊조려 보면,
또한 다음과 같이 상상(象想)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매우 신묘(神妙)하며 신령이 영험하고,
그의 기량(器量)은 깊고 깊어 잠겨서 밝은 모양인데,
말하자면 맑고 푸른 바다(滄海:창해)에 밝은 달(明月)이 밝게 비추니
그 밝게 비추는 달빛과 그 맑은 바닷물이 하나가 되어(同流:동류) 흐르는 모습.
그 물 속에 달그림자, 아! 얼마나 아름답고 기이한가?
라고 표현하고 있다.
『雖然此在(수연차재) 公特餘事耳(공특여사이)
其行治之?(기행치지?) ?出倫類(?출륜유)
孝悌通於神明(효제통어신명)
忠義根於性?(충의근어성?)
才足以贊猷華國(재족이찬유화국)
識足以正誼明理(식족이정의명리)』
비록 그러하나 이는 공(公)에게 다만 여사(餘事: 여가로 하는 일)일 뿐이다.
그 스스로를 다스리는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 가운데 돋보이니,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를 받들어 순종한 일은 신명(神明)과 통(通)하고,
그의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떳떳한 성품에 기인하며,
그의 재주는 족히 임금을 도와 나라를 빛낼 만하고(華國),
식견(識見)으로는 도리를 바르게(正誼) 하고, 이(理)를 흡족히 밝힐(明現) 만하다고 하였다.
『自?勵蔚(자?려율) 爲當世名儒(위당세명유)
是不但淸文(시불단청문) 奇氣之聳(기기지용)
服人觀聽而已也(복인관청이이야)』
스스로 힘써 학문(學文)을 닦아 우뚝하게 당세(當世)의 이름난 선비(名儒)가 되니,
이는 그의 맑고 깨끗한 글(淸文)에는 기이(奇異)한 기운(氣運)이 높이 서려 있어(奇氣之聳),
그의 글을 보고 듣는 사람들을 삼가 두렵게 하며, 또한 감복(服人)케 하는 것을 더욱 더하여 준다고 하였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은, 외진 벽지(僻地)에서 늦게 태어나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못내 크게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1583년인 선조 16년 8월, 그가 성균관 진사(辰巳) 시절에 우리나라에 오현(五賢)이신,
이황(李滉),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을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에 제향할 수 있도록 청(請)하는 상소문을 올려,
공론화를 시켰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의심(疑心)스러워하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에는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않고 후일을 내다보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1585년인 선조 18년(乙酉) 봄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옥계서당(玉溪書堂)을 찾아가서 배(拜)를 올렸다고 한다.
그 해 10월에 별시을과(別試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關) 검열이 되었으며,
1586년 선조 19년 1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 뵙고, 선성(宣城) 즉 지금의 안동의 예안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편집과 교정을 보았던 것이다.
1599년 선조 32년 5월에 선생께서는 중훈(中訓)대부로 올랐으며,
이 때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찾아 뵙고 가을에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 감독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 때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할 때, 물자조달(物資調達)을 하며, 일을 도왔다고 한다.
숙모당연종애편(叔母當年鍾愛偏)
앙연수기자초년(昻然秀氣自齠年)
상비벽군무인걸(常悲僻郡無人傑)
만희쇠문득이현(晩喜衰門得爾賢)
무은일반방표울(霧隱一班方豹蔚)
풍박만리저붕건(風搏萬里竚鵬騫)
전춘척독재상문(前春尺牘纔相問)
가인금래견차천(可忍今來見此阡)
숙모(叔母: 말세의 어머니)가, 그 당시 매우 귀여워하였는데,
이를 갈 어린 나이인데도, 밝고 아름다움이 빼어나구나.
늘상 마음이 아픈 것은, 후미진 고을에 인걸(人傑)이 없다는 것이다.
뒤늦게(말세의 끝) 기쁘게도 쇠락(衰落)한 가문에, 그대와 같은 현인(賢)을 가지게 되었는데
온통 안개가 가리우더니, 때가 이르러 표범의 무늬가 완연하게 드러는구나(豹蔚).
만리(萬里) 밖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날개치며 다가오더니, 잠시 있던 붕(鵬)새가 들어올리는 것은
춘(春) 앞으로 보낸 편지이니, 비로소 춘(春)이 자세히 보게 되는구나.
가히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에 와서 보니, 여기는 무덤길이구나.
이 시(詩)를 풀이하는 글에서 해월(海月) 선생이 조카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지(墓地)를 잡기 위해,
울진읍(蔚珍邑) 인근의 정림사(井林寺)를 가면서 지은 시(詩)로 설명되어 있다.
이 시(詩)를 잘 보면 숙모(叔母)란 단순한 의미로 쓴 말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말세(末世)의 어머니, 즉 하나님을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表現)한 말이다.
한 아이를 매우 귀여워하였는데,
참으로 이를 갈 어린 나이지만은 착하고 빼어난 기운이 높이 오르는 아이라는 것이다.
이 시골 벽촌에 인재(人才)가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아주 쇠락(衰落)한 가문(家門)에서 이와 같은 현인(賢人)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기쁘다고 한 것이다.
안개가 그 표범(豹)의 아름다움을 모두 가려 놓았지만,
때가 이르니 그 표범의 아름다운 무늬가 완연하게 세상에 드러난다고 하였다.
만리(萬里) 밖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날개를 치며 다가오더니,
그 붕(鵬)새가 들어올리는 것은,
춘가(春家) 앞으로 보내온 편지인데,
그 춘(春)이 그 편지를 받아서 자세(仔細)히 읽어 보게 된다는 것이다.
가히 참지 못하고 지금 와서 보니, 이 길은 무덤길이구나 하였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내용(內容)이 들어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벽촌에 이렇다 할 인걸(人傑)이 없었는데,
뒤늦게 말세(末世)에 쇠락(衰落)한 즉 영락(零落)한 가문(家門)에서 이러한 현인(賢人)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는 것과 그 비유로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표범(豹)이 때가 되니 그 표범(豹)의 아름다운
모습이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만리(萬里) 밖의 붕(鵬)새가 편지를 전해 주는데,
그 편지는 춘가(春家)의 춘(春) 앞으로 보내는 편지인데,
그 춘(春)이 비로소 붕(鵬)새가 전해 준 그 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가히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에 와서 보니 여기는 무덤길이라고 하였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화천(化天)하셔서,
그 아들인 춘(春)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월(海月) 선생은 전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시(詩)에서 해월(海月) 선생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길 바라네.“ 하자 한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그 표범(豹)을 안개가 가려 놓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라고 하자
“주역(周易)의 택화혁(澤火革)을 보면
혁(革)이란 바로잡는 것으로, 혁신(革新), 혁명(革命), 변혁(變革)의 혁(革)자인 것이다.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해 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大人虎變(대인호변) 末占有孚(말점유부)
象曰(상왈) 大人虎變其文炳也(대인호변기문병야)』
『君子豹變小人革面(군자표변소인혁면)......
象曰君子豹變其文蔚也(상왈군자표변기문울야) 小人革面(소인혁면) 順以從君也(순이종군야)』
이 말은 대인(大人)은 호랑이(虎)처럼 개혁한다.
점(占)을 치지 않아도 천하(天下) 만민(人)의 신뢰를 받는다.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은 호랑이처럼 개혁(改革)한다 함은 그 무늬가 뚜렷이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상육(上六)에 군자(君子)는 표범(豹)처럼 개혁하고, 소인(小人)은 면(面)을 바꾼다.
또한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표범(豹)처럼 개혁(改革)한다는 말은,
표범(豹)의 털 무늬가 아름답고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인이 면(面)을 바꾼다는 말은, 뜻을 새롭게 해서 군주(君主)에게 기꺼이 복종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대인(大人)이 호랑이(虎)처럼 개혁(改革)한다 함은,
대인(大人)이 난(亂)을 다스려 천하(天下)를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함이,
호랑이(虎)의 가죽무늬처럼 분명하다는 것이다.
위대한 도덕(道德)과 재능(才能)을 갖추고 있는 대인(大人)은, 혁명(革命)을 완수하여 구습(舊習), 구악(舊惡)을 제거하는데, 마치 가을이 되어 호랑이(虎) 털이 윤기 있고 색채가 선명한 털로 바뀌는 것처럼 국가(國家)의
법률제도(法律制度)나 인심(人心)의 면목을 새롭게 하여 아름다웁게 바꾼다는 것이다.
대인(大人)의 혁명(革命)은, 하늘에 따르고 사람에 응하는 것으로, 천하(天下)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대인(大人)의 지성(至誠)스러운 진실을 믿는다.
그것은 점(占)쳐 볼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군자(君子)는 표범(豹)처럼 개혁(改革)한다고 하였다.
또한 호랑이(虎)와 마찬가지로, 가을이 되면 역시 윤기 있는 아름다운 털로 바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호변(虎變), 표변(豹變)이라는 말은, 호랑이(虎)와 표범(豹)이 가을이 되어 털갈이 하고 일변(一變)해서
아름다운 모양을 나타내는 것을, 대인군자(大人君子)가 혁신(革新)을 통하여, 상극(相剋)과 모순(矛盾)을
제거하여 천하(天下)를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은연중에 이 후미진 시골 벽지(僻地)에 인걸(人傑)이 없었으나,
말세(末世)에 한 아이가 태어나서 이토록 영락(零落)한 즉 쇠락(衰落)한 가문(家門)을 이어받아 세우는데,
이를 현인(賢人)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 현인(賢人)을 안개 속에 숨겨져 있는 표범(豹)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 안개 속에 숨어 있는 표범(霧豹)이란 말은,
옛 시(詩) 속에 등장하는 말로, 남산(南山)에 사는 표범은 그 털의 무늬가 더렵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안개와
비가 내리면 굴 속에 숨는다는 데서, 숨어서 이름을 온전히 하거나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인 것이다.
즉 해월(海月) 선생의 후손(後孫) 중에, 이 쇠락(衰落)한 가문을 이어나갈 한 현자(賢者)가 있는데,
즉 대인(大人)이고 군자(君子)인 이 현자(賢者)가, 안개 속에 숨어서 은거(隱居)하시다가 때라 이르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개혁(改革)한다는 것을 전(傳)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어질 현(賢)자를 잘 기억해두기 바란다.
특히 이 현(賢)자가 예언서(豫言書)에서는, 자주 눈에 뜨이는데 아주 큰 뜻이 들어있는 글자인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밝혀 보겠다.
해월유록(海月遺錄) 중... 천명(天命) <13>..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0) | 2021.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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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유록(海月遺錄) 중... 천명(天命) <12>...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0) | 2021.03.27 |
해월유록(海月遺錄) 중... 천명(天命) <10>...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0) | 2021.03.21 |
해월유록(海月遺錄) 중... 천명(天命) <9>...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0) | 2021.03.19 |
해월유록(海月遺錄) 중... 천명(天命) <8>...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0) | 2021.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