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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乾) - 문언전(文言傳)

■ 주역 (周易)

by 雪中梅 2020. 8. 6. 22:49

본문

()문언전(文言傳)

 

文言曰 元者善之長也亨者嘉之會也利者義之和也貞者事之幹也

 

문언전(文言傳)에 말하였다.

()은 선()의 으뜸이요, ()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는 의()에 화함이요, ()

일의 근간이니,

 

他卦彖象而已獨乾坤更設文言하여 以發明其[一作文] 하니라 推乾之道하여 施於人事하니 元亨利貞乾之四德在人이면 則元者衆善之首也亨者嘉美之會也利者和合於義也貞者幹事之用也.

 

다른 괘()단전(彖傳)상전(象傳)뿐이요, 오직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만이 문언전(文言傳)을 두어 그 뜻을 밝혔다. 건도(乾道)를 미루어 사람의 일에 시행하니, ()의 원(((() 네 덕()이 사람에게 있으면, ()은 여러 선()의 으뜸이요, ()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는 의()에 화합함이요, ()은 일을 주간(主幹)할 때의 쓰임이다.

 

本義此篇申彖傳象傳之意하여 以盡乾坤二卦之蘊하니 而餘卦之說因可以例推云이라.

이 편은 단전(彖傳)상전(象傳)의 뜻을 거듭 말하여 건(), () 두 괘()의 깊은 뜻을 다하였으니, 다른 괘()의 말도 따라서 이 예로 미루어 알 수 있다.

 

元者生物之始天地之德莫先於此於時爲春이요 於人則爲仁而衆善之長也亨者生物之通이니 物至於此하면 莫不嘉美於時爲夏於人則爲禮而衆美之會也利者生物之遂物各得宜하여 不相妨害於時爲秋於人則爲義而得其分之和貞者生物之成이니 實理具備하여 隨在各足이라 於時爲冬이요 於人則爲智而爲衆事之幹이니 木之身而枝葉所依以立者也.

 

()은 생물(生物)[물건을 낳음]의 시작이니, 천지(天地)의 덕()이 이보다 먼저함이 없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이 되어 모든 선()의 으뜸이 된다. ()은 생물(生物)의 통함이니, 물건이 이에 이르면 아름답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예()가 되어 모든 아름다움의 모임이 된다. ()는 생물(生物)의 이룸이니, 물건이 각기 마땅함을 얻어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가 되어 그 분수의 화함을 얻음이 된다. ()은 생물(生物)의 완성이니, 실리(實理)가 갖추어져서 있는 곳에 따라 각기 충족하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가 되어 모든 일의 근간이 된다. ()은 나무의 몸통으로 가지와 잎이 의지하여 서는 것이다.

 

君子體仁足以長人이며

군자(君子)가 인()을 체행함이 남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며,

 

體法於乾之仁乃爲君長之道足以長人也體仁體元也比而效之謂之體.

 

()의 인()을 본받음은 바로 군장(君長)이 될 수 있는 도()이니, 족히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을 체행함은 원()을 체행하는 것이니, 견주어 본받음을 체()라 한다.

 

嘉會足以合禮,

모임을 아름답게 함이 족히 예()에 합하며,

 

得會通之嘉라야 乃合於禮也不合禮則非理豈得爲嘉리오 非理安有亨乎.

회통(會通)의 아름다움을 얻어야 예()에 합한다. ()에 합하지 않으면 이치가 아니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치가 아니면 어찌 형통함이 있겠는가.

 

利物足以和義,

물건을 이롭게 함이 족히 의()에 조화되며,

 

和於義라야 乃能利物이니 豈有不得其宜而能利物者乎.

()에 화합하여야 물건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어찌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고 물건을 이롭게 함이 있겠는가.

 

貞固足以幹事,

()하여 견고함이 족히 일의 근간이 될 수 있으니,

 

[一作正]所以能幹事也.

정고(貞固)함은 일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本義以仁爲體則无一物不在所愛之中이라 足以長人이요 嘉其所會則无不合禮使物各得其所利則義无不和貞固者知正之所在而固守之所謂知而弗去者也足以爲事之幹이라.

 

()으로써 체()를 삼으면 어느 한 물건도 사랑하는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족히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요, 그 모이는 바를 아름답게 하면 예()에 합하지 않음이 없고, 물건이 그 이로운 바를 얻게 하면 의()로와서 화하지 않음이 없다. 정고(貞固)는 정도(正道)가 있는 곳을 알아 굳게 지키는 것이니, 이른바 알아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君子行此四德者曰 乾元亨利貞이라.

군자(君子)는 이 사덕(四德)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건()은 원()하고 형()하고 이()하고 정()하다 한 것이다.

 

行此四德이라야 乃合於乾也.

이 사덕(四德)을 행하여야 건도(乾道)에 합한다.

 

本義非君子之至健이면 无以行此曰乾元亨利貞이라 하니라.

군자(君子)의 지극히 굳셈이 아니면 이것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건()은 원()하고 형()하고 이()하고 정()하다 한 것이다.

 

第一節이니 申彖傳之意與春秋傳所載穆姜之言不異하니 疑古者已有此語어늘 穆姜稱之而夫子亦有取焉이라 下文別以子曰表孔子之辭하니 蓋傳者欲以明此章之爲古語也.

 

이는 제1()이니, 단전(彖傳)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이 내용은 춘추전(春秋傳)에 실린 목강(穆姜)의 말과 다르지 않으니, 아마도 이미 옛날부터 있었던 이 말을 목강(穆姜)이 칭하였고 공자(孔子)도 취하신 듯하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 별도로 자왈(子曰)’로써 공자(孔子)의 말씀임을 표시하였으니, 이를 전하는 이가 이 장()이 옛말임을 밝히고자 해서인 듯하다.

 

初九曰 潛龍勿用何謂也子曰 龍德而隱者也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여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여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여 確乎其不可拔潛龍也.

 

초구(初九)에 말하기를 잠겨 있는 용()은 쓰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덕(龍德)을 가지고 은둔한 이이니, 세상에 따라 변치 않으며 명성을 이루려 하지 않아, 세상에 은둔하되 근심하지 않으며,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고민하지 않아, 즐거운 세상이면 도()를 행하고 걱정스런 세상이면 떠나가서, 뜻이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것이 잠겨있는 용()이다.”

 

自此以下言乾之用하니 用九之道也初九陽之微龍德之潛隱이니 乃聖賢之在側陋也守其道하여 不隨世而變하고 晦其行하여 不求知於時하여 自信自樂하여 見可而動하고 知難而避하여 其守堅不可奪이니 潛龍之德也.

 

이 이하는 건()의 쓰임을 말하였으니, ()를 쓰는 방법이다. 초구(初九)는 양()이 미미하니, 용덕(龍德)이 잠기고 숨은 것으로 성현(聖賢)이 미천할 때이다. 그 도()를 지켜 세상에 따라 변치 않으며, 그 행동을 감추어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아 스스로 믿고 스스로 즐거워하여 가능함을 보고 동하며 어려움을 알고 피하여, 그 지킴이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으니, 잠룡(潛龍)의 덕()이다.

 

本義龍德聖人之德也在下故이라 謂變其所守大抵乾卦六爻文言皆以聖人明之하니 有隱顯而无淺深也.

 

용덕(龍德)은 성인(聖人)의 덕()인데, 아랫자리에 있으므로 숨은 것이다. ()은 그 지키는 바를 변함이다. 대저 건괘(乾卦)의 육효(六爻)문언전(文言傳)은 모두 성인(聖人)으로 밝혔으니, 숨고 나타남은 있으나 덕()에 깊고 얕음은 없다.

 

九二曰 見龍在田利見大人何謂也子曰 龍德而正中者也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여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

 

구이(九二)에 말하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덕(龍德)으로 정중(正中)한 이이니, 평상시의 말을 믿게 하고 평상시의 행동을 삼가서, ()를 막고 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좋게 하고도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이 넓어 교화하는 이이니, ()에 이르기를 현룡(見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는 군주의 덕()이다.”

 

以龍德而處正中者也在卦之正中하니 爲得正中之義庸信庸謹造次必於是也旣處无過之地則唯在閑邪邪旣閑則誠存矣善世而不伐不有其善也德博而化正己而物正也皆大人之事雖非君位君之德也.

 

용덕(龍德)으로써 정중(正中)에 처한 이이다. ()의 가운데 있으니 정중(正中)을 얻은 뜻이 된다. 평상시의 말을 믿게 하고 평상시의 행실을 삼간다는 것은 잠시라도 이에 반드시 하는 것이다. 이미 과실이 없는 곳에 처했으면 오직 사()를 막음에 있을 뿐이니, 이미 사()를 막았으면 성()이 보존된다. 세상을 좋게 하고도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선()을 소유하지 않음이요, ()이 넓어 교화시킨다는 것은 자기를 바르게 함에 사물이 바루어지는 것이다. 모두 대인(大人)의 일이니, 비록 군주의 지위는 아니나 군주의 덕()인 것이다.

 

本義正中不潛而未躍之時也常言亦信하고 常行亦謹盛德之至也閑邪存其誠无斁亦保之意言君德也者釋大人之爲九二也.

 

정중(正中)은 못에 잠기지도 않고 위로 뛰어오르지도 않은 때이다. 평상시의 말도 믿게 하고 평상시의 행동도 삼감은 성덕(盛德)이 지극한 것이다. ()를 막고 성()을 보존한다는 것은 싫어함이 없을 때에도 보존한다는 뜻이다. 군덕(君德)이라고 말한 것은 대인(大人)이 구이(九二)가 됨을 해석한 것이다.

 

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何謂也子曰 君子進德修業하나니 忠信所以進德也修辭立其誠所以居業也知至至之可與幾也知終終之可與存義也是故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乾乾하여 因其時而惕하면 雖危无咎矣리라.

 

구삼(九三)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는 덕()을 진전시키고 업()을 닦나니, (()이 덕()을 진전시키는 것이요 말을 함에 그 성실함을 세움이 업()을 보유(保有)하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 더불어 기미를 알 수 있고, 마칠 데를 알아 마치므로 더불어 의()를 보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쓰고 힘써 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三居下之上而君德已著하니 將何爲哉唯進德修業而已內積忠信所以進德也擇言篤志所以居業也知至至之致知也求知所至而[一後字] 後至之知之在先이라 可與幾所謂始條理者知()之事也知終終之力行也旣知所終이면 則力進而終之守之在後可與存義所謂終條理者聖之事也學之始終也君子之學如是知處上下之道而无驕憂하고 不懈而知懼하여 雖在危地而无咎也.

 

()은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여 군주의 덕()이 이미 드러났으니, 장차 무슨 일을 하겠는가. 오직 진덕(進德)과 수업(修業)을 할 뿐이다. 안에 충신(忠信)을 쌓는 것이 진덕(進德)이요, 말을 가려 하고 뜻을 돈독히 하는 것이 거업(居業)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는 것은 치지(致知)인 바, 이를 곳을 알기를 구한 뒤에 이르니, 아는 것이 먼저 있다. 그러므로 더불어 기미를 안다고 한 것이니, 이른바 조리(條理)를 시작함은 지()의 일이라는 것이다.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역행(力行)이니, 이미 마칠 곳을 알았으면 힘써 나아가 마쳐야 하니, 지키는 것은 뒤에 있다. 그러므로 더불어 의()를 보존하는 것이니, 이른바 조리(條理)를 끝마침은 성()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학문의 시작과 끝이다. 군자(君子)의 학문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위와 아래에 처하는 도리를 알아 교만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으며 두려워할 줄을 알아 비록 위태로운 자리에 있어도 허물이 없는 것이다.

 

本義忠信主於心者无一念之不誠也修辭見於事者无一言之不實也雖有忠信之心이나 然非修辭立誠이면 則无以居之知至至之進德之事知終終之居業之事所以終日乾乾而夕猶惕若者以此故也可上可下하고 不驕不憂하니 所謂无咎也.

 

충신(忠信)은 마음에 주장하는 것이니 한 생각이라도 성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말을 함은 일에 나타나는 것이니 한 마디 말이라도 성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비록 충신(忠信)의 마음이 있더라도 말을 함에 성실함을 세우지 않으면 머물지 못한다. 이를 데를 알아 이름은 진덕(進德)의 일이요, 마칠 데를 알아 마침은 거업(居業)의 일이니,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오히려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위로 오를 수도 있고 아래로 내려올 수도 있으며 교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니, 이른바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九四曰 或躍在淵无咎何謂也子曰 上下无常非爲邪也進退无恒非離群也君子進德修業欲及時也无咎니라.

 

구사(九四)에 말하기를 혹 뛰어오르거나 연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오르고 내림에 일정함이 없는 것이 간사함이 되지 않으며, 나아가고 물러감에 항상함이 없는 것이 동류(同類)를 떠남이 아니다. 군자(君子)가 진덕(進德)하고 수업(修業)함은 때에 미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或躍或處하여 上下无常하고 或進或退하여 去就從宜非爲邪枉이요 非離群類進德修業欲及時耳時行時止하여 不可恒也云或이라 深淵者龍之所安也在淵謂躍就所安이라 淵在深而言躍但取進就所安之義疑辭隨時而未可必也君子之順時猶影之隨形이니 可離非道也.

 

혹 뛰어오르고 혹 머물러 있어서 오르내림에 일정함이 없고, 혹 나아가고 혹 물러나 거취가 마땅함을 따름이 간사하거나 굽은 것이 아니요, 여러 동류(同類)와 떨어짐이 아니니, 진덕(進德)하고 수업(修業)함은 때에 미치고자 할 뿐이다. 때로 행하고 때로 멈추어 항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혹()이라고 말한 것이다. 깊은 못은 용이 편안히 있는 곳이니, 못에 있다는 것은 용()이 뛰어 편안한 곳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못은 깊은 곳에 있는데 뛴다고 말함은 다만 편안한 곳으로 나아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은 의문사이니, 때에 따르고 반드시 함은 아니다. 군자(君子)가 때를 따름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本義內卦以德學言이요 外卦以時位言이라 進德修業九三備矣此則欲其及時而進也.

 

내괘(內卦)는 덕()과 학문(學問)으로 말하고, 외괘(外卦)는 때와 지위로 말하였다. 진덕(進德), 수업(修業)은 구삼효(九三爻)에 구비하였고 이는 때에 미처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九五曰 飛龍在天利見大人何謂也子曰 同聲相應하며 同氣相求하여 水流濕하며 火就燥하며 雲從龍하며 風從虎聖人作而萬物覩하나니 本乎天者親上하고 本乎地者親下하나니 則各從其類也니라.

 

구오(九五)에 말하기를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여,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가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성인(聖人)이 나옴에 만물(萬物)이 우러러본다. 하늘에 근본한 것은 위를 친히 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아래를 친히 하니, 각기 그 유()를 따르는 것이다.”

 

人之與聖人類也五以龍德升尊位하니 人之類莫不歸仰이어든 況同德乎上應於下하고 下從於上하니 同聲相應하고 同氣相求也流濕, 就燥, 從龍, 從虎皆以氣類聖人作而萬物皆覩하니 上旣見下하고 下亦見上이라 人也古語云人物物論이라 하니 謂人也易中利見大人其言則同이나 義則有異하니 如訟之利見大人謂宜見大德中正之人則其辨明이니 言在見前이요 乾之二五則聖人旣出上下相見하여 共成其事所利者見大人也言在見後本乎天者如日月星辰이요 本乎地者如蟲獸草木이라 陰陽各從其類하니 人物莫不然也.

 

일반인과 성인(聖人)은 동류(同類)이다. 구오(九五)가 용덕(龍德)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르니, 인류가 돌아가 우러르지 않음이 없거든 하물며 덕()이 같음에랴. 위는 아래에 응하고 아래는 위를 따르니, 같은 소리가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구하는 것이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가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름은 모두 기()가 같은 유()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나옴에 만물(萬物)이 모두 우러러보는 것이니, 윗사람이 이미 아랫사람을 만나보고 아랫사람 역시 윗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다. ()은 사람이다. 옛말에 인물(人物)이라 하고 물론(物論)이라 하였는데, 사람을 말한다.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것은 그 말은 같으나 뜻은 서로 다르니, 예컨대 송괘(訟卦)이견대인(利見大人)’은 대덕(大德중정(中正)의 사람을 만나보면 그 분변이 명백함을 말한 것으로 만나보기 전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요, 건괘(乾卦)의 구이(九二)와 구오(九五)는 성인(聖人)이 이미 나옴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만나서 함께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니, 이로운 것이 대인(大人)을 만나보는 것으로 만나본 뒤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늘에 근본한 것은 해와 달, 별과 같은 것들이요, 땅에 근본한 것은 벌레와 짐승, 초목과 같은 것들이다. ()과 양()이 각기 그 유()를 따르니, 사람과 물건도 그렇지 않음이 없다.

 

本義起也猶人也釋利見之意也本乎天者謂動物이요 本乎地者謂植物이라 物各從其類하니 聖人人類之首也興起於上則人皆見之.

 

()은 흥기(興起)함이요, ()은 인()과 같다. ()는 이견(利見)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하늘에 근본한 것은 동물을 이르고 땅에 근본한 것은 식물을 이른다. 물건이 각기 그 유()를 따르니, 성인(聖人)은 인류의 우두머리이므로 위에서 흥기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는 것이다.

 

上九曰 亢龍有悔何謂也子曰 貴而无位하며 高而无民하며 賢人在下位而无輔是以動而有悔也니라.

 

상구(上九)에 말하기를 끝까지 올라간 용()이니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귀하나 지위가 없으며 높으나 백성이 없으며 현인(賢人)이 아랫자리에 있어서 도와주는 이가 없다. 이 때문에 동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九居上而不當尊位是以无民无輔하여 動則有悔也.

 

()가 상()에 거하여 높은 자리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성이 없고 보필하는 이가 없어서 동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本義賢人在下位謂九五以下无輔以上九過高志滿하여 不來輔助之也.

현인(賢人)이 아랫자리에 있다는 것은 구오(九五) 이하를 이르고, 보필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상구(上九)가 지나치게 높고 뜻이 자만하여 와서 도와주지 않음을 이른다.

第二節이니 申象傳之意하니라.

이는 제2()이니, 상전(象傳)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潛龍勿用下也.

잠룡(潛龍)은 쓰지 말라는 것은 아래에 있기 때문이요,

 

此以下言乾之時勿用以在下하여 未可用也.

이 이하는 건()의 때를 말하였다. 쓰지 말라는 것은 아래에 있어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見龍在田時舍也.

현룡(見龍)이 밭에 있다는 것은 때로 멈추라는 것이요.

 

본의때가 버림이요.

 

隨時而止也.

때에 따라 멈추는 것이다.

 

本義言未爲時用也.

때에 쓰임이 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終日乾乾行事也.

종일(終日)토록 힘쓰고 힘쓴다는 것은 일을 행함이요,

 

進德修業也.

()을 진전시키고 업()을 닦는 것이다.

 

或躍在淵自試也,

혹 뛰어오르거나 못에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시험함이요,

 

隨時自用也.

때에 따라 스스로 쓰는 것이다.

 

本義未遽有爲姑試其可.

대번에 일을 할 수는 없고 우선 그 가함을 시험하는 것이다.

 

飛龍在天上治也,

비룡(飛龍)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위의 다스림이요,

 

본의위에서 다스림이요

 

得位而行上之治也.

지위를 얻어 행함은 위의 다스림이다.

 

本義居上以治下.

위에 거하여 아래를 다스리는 것이다.

 

亢龍有悔窮之災也,

항룡(亢龍)이니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궁극함의 재앙이요,

 

窮極而災至也.

궁극하여 재앙이 이른 것이다.

 

乾元用九天下治也.

건원(乾元)의 용구(用九)는 천하가 다스려짐이다.

 

用九之道天與聖人同하니 得其用이면 則天下治也.

()를 쓰는 방법은 하늘과 성인(聖人)이 같으니, 그 씀을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本義言乾元用九見與他卦不同이니 君道剛而能柔天下无不治矣리라.

건원(乾元)의 용구(用九)라고 말한 것은 다른 괘()와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군주의 도()가 강하면서 능히 부드러우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第三節이니 再申前意하니라.

이는 제3()이니, 앞의 뜻을 다시 밝힌 것이다.

 

潛龍勿用陽氣潛藏이요,

잠룡(潛龍)은 쓰지 말라는 것은 양()의 기운이 잠기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요,

 

此以下言乾之義方陽微潛藏之時하니 君子亦當晦隱이요 未可用也.

이 이하는 건()의 뜻을 말하였다. ()이 미약하여 잠기고 감추는 때를 당하였으니, 군자(君子) 역시 숨고 은둔하여야 하고 써서는 안 된다.

 

見龍在田天下文明이요,

현룡(見龍)이 밭에 있다는 것은 천하(天下)가 문명(文明)함이요,

 

龍德見於地上이면 則天下見其文明之化也[一作而化之].

용덕(龍德)이 지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그 문명(文明)의 교화(敎化)를 입는다.

 

本義雖不在上位然天下已被其化.

비록 윗자리에 있지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 교화를 입는다.

 

終日乾乾與時偕行이요,

종일토록 힘쓰고 힘쓴다는 것은 때에 따라 함께 행하는 것이요,

 

隨時而進也.

때에 따라 나아가는 것이다.

 

本義時當然也.

때가 당연한 것이다.

 

 

或躍在淵乾道乃革이요,

혹 뛰어오르거나 못에 있다는 것은 건도(乾道)가 이에 변혁함이요,

 

離下位而升上位하니 上下革矣.

아랫자리를 떠나 윗자리로 오르니 상하가 변혁된다.

 

本義離下而上하니 變革之時.

아랫자리를 떠나 윗자리로 오르니, 변혁의 시기이다.

 

飛龍在天乃位乎天德이요,

비룡(飛龍)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마침내 천덕(天德)에 자리함이요,

 

正位乎上하여 位當天德[一作德矣] 이라.

위에 자리를 바로하여 지위가 천덕(天德)에 당한 것이다.

 

本義天德卽天位也蓋唯有是德이라야 乃宜居是位以名之.

천덕(天德)은 곧 천자의 자리이니, 오직 이 덕()이 있어야 이 지위에 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덕(天德)’이라고이름한 것이다.

 

亢龍有悔與時偕極이요.

항룡(亢龍)이니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때와 함께 궁극함이요,

 

時旣極則處時者亦極矣.

때가 이미 궁극에 달하면 때에 처하는 이도 궁극하기 마련이다.

 

乾元用九乃見天則이라.

건원(乾元)의 용구(用九)는 이에 하늘의 법칙을 볼 수 있다.

 

用九之道天之則也天之法則謂天道也或問乾之六爻皆聖人之事乎曰 盡其道者聖人也得失則吉凶存焉이니 豈特乾哉리오 諸卦皆然也니라.

()를 쓰는 방법은 하늘의 법칙이니, 하늘의 법칙이란 천도(天道)를 이른다. 혹자가 묻기를 건괘(乾卦)의 육효(六爻)가 모두 성인(聖人)의 일입니까?”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도리를 다하는 이는 성인(聖人)이다. 잘하고 잘못함은 길흉이 이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유독 건괘(乾卦)만 그렇겠는가. 모든 괘()가 다 그러하다.”

 

本義剛而能柔天之法也.

강하면서 능히 부드러움은 하늘의 법칙이다.

 

第四節이니 又申前意하니라.

이는 제 4()이니, 앞의 뜻을 다시 밝혔다.

 

乾元者始而亨者也,

건원(乾元)은 시작하여 형통한 것이요,

 

又反覆詳說하여 以盡其義旣始則必亨이니 不亨則息矣.

또 반복하여 상세히 말해서 그 뜻을 다하였다. 이미 시작하면 반드시 형통하니, 형통하지 못하면 종식되고 만다.

 

本義始則必亨理勢然也.

시작하면 반드시 형통함은 이치와 형세에 그러한 것이다.

 

利貞者性情也.

()와 정()은 성정(性情)이다.

 

乾之性情也旣始而亨하니 非利貞이면 其能不息乎.

()의 성정(性情)이다. 이미 시작하여 형통하니, ()와 정()이 아니면 종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本義收斂歸藏乃見性情之實이라.

수렴하고 돌아가 감춤에 성정(性情)의 실제를 볼 수 있다.

 

乾始能以美利利天下不言所利하니 大矣哉.

()의 시작이 아름다운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하므로 굳이 이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로움이 크구나.

 

乾始之道 能使庶類生成하여 天下蒙其美利로되 而不言所利者蓋无所不利하여 非可指名也贊其利之大曰大矣哉라 하니라.

 

건시(乾始)의 도()가 여러 종류(種類)가 능히 생성하게 하여 천하가 그 아름다운 이로움을 입으나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는 것은 이롭지 않은 바가 없어서 지적하여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로움의 큼을 칭찬하여 크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本義始者元而亨也利天下者利也不言所利者貞也或曰 坤利牝馬則言所利矣라 하니라.

시작한다는 것은 원()하고 형()함이요, 천하를 이롭게 함은 이()이고,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음은 정()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곤괘(坤卦)에 빈마(牝馬)면 이로운 바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哉乾乎剛健中正純粹精也,

위대하다, ()이여!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함이 정()함이요

,

本義剛健中正純粹精也,

 

본의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함이 순수(純粹)하여 정()하고

 

本義以體言이요 兼用言이요 中者其行无過不及이요 正者其立不偏이니 四者乾之德也純者不雜於陰柔粹者不雜於邪惡이니 蓋剛健中正之至極이요 而精者又純粹之至極也或疑乾剛无柔하니 不得言中正者라 하니 不然也天地之間本一氣之流行而有動靜爾以其流行之統體而言이면 則但謂之乾而无所不包矣以其動靜分之然後有陰陽剛柔之別也니라.

()은 체()로써 말한 것이요, ()은 용()을 겸하여 말한 것이요, ()은 그 행실이 과()하거나 불급(不及)함이 없는 것이요, ()은 그 섬이 치우치지 않은 것이니, 네 가지는 건()의 덕()이다. ()은 음유(陰柔)에 섞이지 않음이요, ()는 사악(邪惡)에 섞이지 않음이니, 강건중정(剛健中正)함이 지극한 것이요, ()은 또 순수함이 지극한 것이다. 건강(乾剛)하기만 하고 유()가 없으니 중정(中正)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천지(天地)의 사이에는 본래 한 기운이 유행(流行)하는데 동()과 정()이 있을 뿐이니, 유행(流行)의 통체(統體)를 가지고 말하면 다만 건()이라고만 말하여도 포함되지 않음이 없고, ()과 정()으로 나눈 뒤에야 음()과 양(), ()과 유()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六爻發揮旁通情也,

육효(六爻)로 발휘함은 정()에 곡진함이요,

 

本義旁通猶言曲盡이라.

방통(旁通)은 곡진(曲盡)하다는 말과 같다.

 

時乘六龍하여 以御天也雲行雨施天下平也.

때로 육룡(六龍)을 타고 하늘을 나니, 구름이 다니고 비가 내려 천하가 화평하다.

 

大哉贊乾道之大也以剛健中正純粹六者形容乾道하니 謂六者之精極이라 以六爻發揮旁通하여 盡其情義하고 乘六爻之時하여 以當天運이면 則天之功用著矣[一作曰] 雲行雨施하니 陰陽溥暢天下和平之道也.

대재(大哉)는 건도(乾道)의 큼을 찬양한 것이다. (((((() 여섯 가지로 건도(乾道)를 형용하였으니, ()은 이 여섯 가지가 정()함이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육효(六爻)로써 발휘하고 널리 통하여 그 정의(情義)를 다하고 육효(六爻)의 때를 타 천운(天運)을 당하면 하늘의 공용(功用)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구름이 다니고 비가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이니, ()과 양()이 크게 화창함은 천하가 화평한 도()이다.

 

本義言聖人時乘六龍以御天이면 則如天之雲行雨施而天下平也.

성인(聖人)이 때로 육룡(六龍)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은 하늘에 구름이 다니고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 천하가 화평함을 말한 것이다.

 

第五節이니 復申首章之意하니라.

이는 제5()이니, 머릿 장()의 뜻을 다시 밝힌 것이다.

 

君子以成德爲行하나니 日可見之行也潛之爲言也隱而未見()하며 行而未成이라 是以君子弗用也하나니라.

 

군자(君子)는 덕()을 이룸을 행실로 삼으니, 날로 볼 수 있는 것이 행실이다. ()이란 말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며 행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가 쓰지 않는 것이다.

 

본의군자(君子)는 이루어진 덕()을 행실로 삼으니,

 

德之成其事可見者行也德成而後可施於用이니 初方潛隱未見하여 其行未成하니 未成이면 未著也是以君子弗用也.

 

()이 이루어짐에 그 일을 볼 수 있는 것은 행실이다. ()이 이루어진 뒤에야 씀에 베풀 수 있는데, 초구(初九)는 잠기고 숨어서 나타나지 않아 그 행실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드러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가 쓰지 않는 것이다.

 

本義成德已成之德也初九固成德이나 但其行未可見爾.

성덕(成德)은 이미 이루어진 덕()이다. 초구(初九)는 진실로 이루어진 덕()이나 다만 그 행실이 아직 드러날 수 없을 뿐이다.

 

君子學以聚之하고 問以辨之하며 寬以居之하고 仁以行之하나니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

 

군자(君子)가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물어서 분변(分辨)하며 너그러움으로 거하고 인()으로써 행하나니, ()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니, 이는 군자의 덕()인 것이다.

 

聖人在下하여 雖已顯而未得位則進德修業而已學聚問辨進德也寬居仁行修業也君德已著利見大人而進以行之耳進居其位者舜禹也進行其道者伊傅也.

성인(聖人)이 아랫자리에 있어서 비록 이미 드러났으나 군주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면 진덕(進德)하고 수업(修業)할 뿐이다.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分辨)함은 진덕(進德)이다. 너그러움으로 거하고 인()으로 행함은 수업(修業)이다. 군주의 덕()이 이미 드러나면 대인(大人)을 만나보아 나아가서 도()를 행하는 것이 이로우니, 나아가 그 지위에 머무른 이는 순()임금과 우()임금이었고, 나아가 그 도()를 행한 이는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었다.

 

本義蓋由四者하여 以成大人之德이라 再言君德以深明九二之爲大人也.

네 가지로 말미암아 大人을 이룬다. ‘군주의 이라고 두 번 말한 것은 九二大人이 됨을 깊이 밝힌 것이다.

 

九三重剛而不中하여 上不在天하며 下不在田이라 乾乾하여 因其時而惕하면 雖危无咎矣리라.

 

구삼(九三)은 거듭된 강()이고 중()하지 못하여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힘쓰고 힘써서 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을 것이다

.

重剛이니 剛之盛也過中而居下之上하여 上未至於天而下已離於田하니 危懼之地也因時順處하여 乾乾兢惕하여 以防危雖危而不至於咎君子順時兢惕所以能泰也.

구삼(九三)은 거듭된 강()이니 강()이 성()한 것이다. ()을 지나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여 위로는 아직 하늘에 이르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이미 밭에서 떠났으니, 위태롭고 두려운 자리이다. 때에 따라 순히 처하여 힘쓰고 힘쓰며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위험을 방비한다. 그러므로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에는 이르지 않는다. 군자(君子)가 때에 따라 조심하고 두려워함은 편안할 수 있는 소이(所以)이다.

 

本義重剛謂陽爻陽位.

중강(重剛)이라 함은 양효(陽爻)가 양위(陽位)에 있음을 이른다.

 

九四重剛而不中하여 上不在天하며 下不在田하며 中不在人이라 或之하니 或之者疑之也无咎니라.

구사(九四)는 거듭된 강()이고 중()이 되지 못하여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지상에 있지 않고, 가운데로는 인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혹()이라고 하였으니, ()이란 의심하는 말이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不在天, 不在田하고 而出人之上矣危地也疑者未決之辭處非可必也或進或退하여 唯所安耳所以无咎也.

구사(九四)는 하늘에도 있지 않고 지상에도 있지 않으면서 인간의 위로 나왔으니, 위험한 자리이다. ()는 아직 결단하지 못한 말이니, 처함을 기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 나아가고 혹 물러가서 오직 편안한 대로 할 뿐이니,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本義九四非重剛이니 重字疑衍이라 在人謂三이요 或者隨時而未定也.

구사(九四)는 중강(重剛)이 아니니, 중자(重字)는 의심컨대 연문(衍文)인 듯하다. 인간에 있다는 것은 삼()을 말함이요, ()이란 때에 따르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夫大人者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하여 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나니 天且弗違而況於人乎況於鬼神乎.

 

무릇 대인(大人)이란 천지(天地)와 그 덕()이 합하며, 일월(日月)과 그 밝음이 합하며, 사시(四時)와 그 질서가 합하며, 귀신(鬼神)과 그 길흉(吉凶)이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天時)를 받드나니, 하늘도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며, 귀신에게 있어서랴.

 

大人與天地日月四時鬼神合者合乎道也天地者道也鬼神者造化之跡也聖人先於天而天同之하고 後於天而能順天者合於道而已合於道則人與鬼神豈能違也리오.

대인(大人)이 천지(天地), 일월(日月), 사시(四時), 귀신(鬼神)과 더불어 합하는 것은 도()에 합하는 것이다. 천지(天地)는 도()이고 귀신(鬼神)은 조화의 자취이다. 성인(聖人)이 하늘보다 먼저하여도 하늘이 이에 같이 하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하늘에 순응하는 것은 도()에 합할 뿐이니, ()에 합하면 사람과 귀신이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本義大人卽釋爻辭所利見之大人也有是德而當其位라야 乃可以當之人與天地鬼神本无二理로되 特蔽於有我之私是以梏於形體而不能相通하나니 大人无私하여 以道爲體하니 曾何彼此先後之可言哉리오 先天不違謂意之所爲 默與道契後天奉天謂知理如是하여 奉而行之回紇謂郭子儀曰 卜者言此行當見一大人而還이라 하더니 其占蓋與此合이라 하니 若子儀者雖未及乎夫子之所論이나 然其至公无我하니 亦可謂當時之大人矣.

 

대인(大人)은 효사(爻辭)이견대인(利見大人)’의 대인(大人)을 해석한 것이니, 이 덕()이 있으면서 이런 지위에 당하여야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사람은 천지(天地), 귀신(鬼神)과는 본래 두 이치가 없으나 다만 유아(有我)의 사욕에 가리워질 뿐이다. 이 때문에 형체에 질곡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니, 대인(大人)은 사욕이 없어 도()로서 본체를 삼으니, 어찌 피차(彼此)와 선후(先後)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천불위(先天不違)’는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묵묵히 도()와 합함을 말한 것이고, ‘후천봉천(後天奉天)’은 이치가 이와 같음을 알아 받들어 행함을 말한다. 회흘(回紇)이 곽자의(郭子儀)를 두고 말하기를, “점치는 이가 이번 걸음에 한 대인(大人)을 만나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더니, 그 점()이 이와 부합했다.” 하였으니, 곽자의(郭子儀)와 같은 사람은 비록 공자(孔子)가 말씀에는 미치지 못하나 지극히 공정하고 사욕이 없었으니, 역시 당시의 대인(大人)이라 일컬을 수 있다.

 

亢之爲言也知進而不知退하며 知存而不知亡하며 知得而不知喪이니,

 

()이란 말은 나아감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보존함만 알고 망할 줄을 모르며, 얻음만 알고 잃을 줄을 모르는 것이니,

 

本義所以動而有悔也.

이 때문에 동()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其唯聖人乎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인저.

 

오직 성인(聖人)인가?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이는 오직 성인(聖人)뿐일 것이다.

 

極之甚爲亢이니 至於亢者不知進退存亡得喪之理也聖人則知而處之하여 皆不失其正이라 不至於亢也.

 

궁극함이 심한 것을 항()이라 하니, 항극에 이르는 이는 진퇴(進退), 존망(存亡), 득상(得喪)의 이치를 알지 못해서이다. 성인(聖人)은 이를 알고 대처하여 모두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극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本義知其理勢如是而處之以道則不至於有悔矣固非計私以避害者也再言其唯聖人乎始若設問而卒自應之也.

 

이치와 형세가 이와 같음을 알고 도()로써 대처하면 뉘우침이 있음에 이르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사사로움을 헤아려서 해()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기유성인호(其唯聖人乎)’라고 두 번 말한 것은 처음에는 가설하여 묻는 것처럼 하고, 끝에는 스스로 응답한 것이다.

 

第六節이니 復申第二第三第四節之意하니라.

이는 제() 6()이니 제() 2(), () 3(), () 4()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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