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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역대경서 (三易大經序)

■ 삼역대경 (三易大經)

by 雪中梅 2020. 7. 16. 05:28

본문

 

三易大經 차례

 

1. 三易大經全書

삼역대경전서

 

2. 八卦九宮十勝章

팔괘구궁십승장

 

3. 三極弓乙靈符章

삼극궁을영부장

 

4. 日月星正鑑章

일월성정감장

 

5. 大東易學問答

대동역학문답

 

6. 萬物生成章

만물생성장

 

7. 天地鬼神變化章

천지귀신변화장

 

8. 天地運氣章

천지운기장

 

 

三易大經序(삼역대경서)

삼역대경(三易大經)은 이민제(李民濟) 선생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으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아 기록한 글이다.

 

 

三易大經者난 三才之正易也라 其圖有六하니 一른 先天之先天河圖也―오

삼역대경자 삼재지정역야 기도유육 일 선천지선천하도야

 

二난 先天之后天洛書也―오 三은 后天之先天河圖也―오

이 선천지후천락서야― 삼 후천지선천하도야

 

四난 后天之后天洛書也―오 五난 中天之先天河圖也―오

사 후천지후천락서야― 오 중천지선천하도야

 

六은 中天之后天洛書也―니 以先天之河洛으로 定太極하고

육 중천지후천락서야― 이선천지하락 정태극

 

後天之河洛으로 定兩儀하고 中天之河洛으로 定四象則先天은

후천지하락 정양의 중천지하락 정사상즉선천

 

以天開於子之運으로 河圖―爲天八卦하고 后天은 以地闢於丑之運으로

이천개어자지운 하도―위천팔괘 후천 이지벽어축지운

 

洛書―爲地八卦하고 中天은 以人生於寅之運으로 靈符―爲人八卦하니

낙서―위지팔괘 중천 이인생어인지운 영부―위인팔괘

 

先天之三男三女와 后天之三男三女와 中天之三男三女 以三天之三乾三坤으로

선천지삼남삼녀 후천지삼남삼녀 중천지삼남삼녀 이삼천지삼건삼곤

 

各定其位하니 十八局之陰陽兩符 順逆成度하야 河圖之儒道日精과

각정기위 십팔국지음양양부 순역성도 하도지유도일정

 

洛書之佛道月精과 靈符之仙道星精이 大三合于亞字之田 大明弓乙之德하니

낙서지불도월정 영부지선도성정 대삼합우아자지전 대명궁을지덕

 

外一內八이 四方相連에 四九宮之造化― 能作三道春風하야 三八卦之天門地戶

외일내팔 사방상연 사구궁지조화― 능작삼도춘풍 삼팔괘지천문지호

 

次第自開하니 正是枯木逢春之運也―라

차제자개 정시고목봉춘지운야―

 

仙家之碧桃―結實于三千六白年하사 白十字之 融融蕩蕩하야 融融蕩蕩하야

선가지벽도―결실우삼천육백년 백십자지 사상팔괘도덕 융융탕탕

 

充滿于十極世界하니 春宮桃李之夭夭夸여 志士男兒樂樂之時也―라

충만우십극세계 춘궁도이지요요과 지사남아락락지시야

 

以西方之金으로 成于東方之木하야 金木이 合運에 立于中宮하니

이서방지금 성우동방지목 금목 합운 입우중궁

 

弓乙者난 甲乙也―라

궁을자 갑을야

 

土木이 合力用權하야 調和七十二氣候하니 地上天國이 能開人中之天하야

토목 합력용권 조화칠십이기후 지상천국 능개인중지천

 

松柏靑林이 做出五萬有四百年之長春하니 開闢以來 初有之時也―라

송백청림 주출오만유사백년지장춘 개벽이래 초유지시야

 

三易大經이 所以出世也―니 以河洛之數로 推算卽天地之度― 終于癸亥之宮故

삼역대경 소이출세야 이하락지수 추산즉천지지도 종우계해지궁고

 

로 天皇氏之 三八木運이― 㪅生於大海之中하야 海金之乾道―乃以三天之大甲

천황씨지 삼팔목운 갱생어대해지중 해금지건도 내이삼천지대갑

 

者로 起頭則先 后中三極之乾坤이 立其德하야 圖書符―各定其天而六鞱三略이

자 기두즉선 후중삼극지건곤 입기덕 도서부 각정기천이육도삼략

 

發明于世也―니 正是三才成功之秋也―라

발명우세야 정시삼재성공지추야

 

天地之度―以事豫不困之爲德으로 河圖之午正에 洛書―生焉하고 洛書之子正에

천지지도 이사예불곤지위덕 하도지오정 낙서 생언 낙서지자정

 

靈符―生焉하니 子午란 天地之正針이오 日月之正路也―라

영부 생언 자오 천지지정침 일월지정로야

 

夜生於晝와 晝生於夜와 陽生於冬至와 陰生於夏至者―皆是物極必返而事

야생어주 주생어야 양생어동지 음생어하지자 개시물극필반이사

 

豫不困之理也―라 是以로 洛書―生焉而大禹―受之나 然이나

예불곤지리야 시이 낙서 생언이대우 수지 연

 

至于文武周公하야 始乃彖之하시고 靈符―生焉而天一生水之水雲先師―受之나

지우문무주공 시내단지 영부 생언이천일생수지수운선사 수지

 

然이나 至于地二生 火之火雲后師하사 始乃圖之하시니 何哉오

연 지우지이생 화지화운후사 시내도지 하재

 

天運이 在木故로 胞胎之數를 更定而水雲先師―以甲木立申하사

천운 재목고 포태지수 갱정이수운선사 이갑목립신

 

降于甲申하시니 此乃陰中陽生之理也라

강우갑신 차내음중양생지리야

 

然이나 猶在於无極之中故로 受其物形靈符而 不能彰世하시고

연 유재어무극지중고 수기물형영부이 불능창세

 

秪以靈符八卦之度數로 造出東經大全及 龍潭遺詞하사

지이영부팔괘지도수 조출동경대전급 용담유사

 

以詔于世而 終于甲子하시니 推此卽天道之㪅出于 甲子를 亦可期也라

이조우세이 종우갑자 추차즉천도지경출우 갑자 역가기야

 

是以로 少男之艮土丙辰이 以震木庚子之三度로 更爲頭受靈符

시이 소남지간토병진 이진목경자지삼도 갱위두수영부

 

于癸亥之宮하시니 意在新元癸亥之 聖訓이 豈非指此歟아

우계해지궁 의재신원계해지 성훈 기비지차여

 

此靈符난 亞基太極也―라

차영부 아기태극야

 

天地无窮之數와 陰陽不測之機―皆載此書하니 勿爲虛待 龍馬金龜而

천지무궁지수 음양불측지기―개재차서 물위허대 용마금구이

 

早爲覺悟靈符之運하야 策以乾坤하고 察其旺相則三十六符之道와

조위각오영부지운 책이건곤 찰기왕상즉삼십육부지도

 

二十四節之德이 瞭然在掌하야 卦爻彖象이 無所不解而帝出于震을

이십사절지덕 요연재장 괘효단상 무소불해이제출우진

 

庶幾有得也리니 盍相勉旃也哉아

서기유득야 합상면전야재

 

 

三易大經全書(삼역대경전서)

삼역대경(三易大經)은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제3도(三韜)인 54궁(宮) 도수의 수운(水運)으로, 수운(水運) 최제우(崔濟愚) 선생이 오신 것이다.

수운(水運) 선생은 1824년 10월 28일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제우(濟愚)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건져 내려는 결심을 다짐하기 위해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전(前)의 이름은 제선(濟宣)이고 호는 수운(水運)이다.

17세에 아버지를 여위고 26세 때인 1859년 10월에 처가에 있던 처자를 거느리고, 아버지가 남긴 고향의 구미산 밑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운(水運) 선생은 이때에 제우(濟愚)라는 이름을 고쳤으며, 1860(庚申)년 4월 5일 어떤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통하게 되었는데, 곧 몸이 마구 떨리고,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보통 이 날짜를 동학(東學)이 태어나게 된 날짜로 삼는다.

이후로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져서 수운(水運) 최제우(崔濟愚)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수운(水運) 선생은 자신의 가르침이 만고(萬古)에 없는 새로운 도(道)라 하며, 동학(東學)이라 불렀다.

서양(西洋)이 아니라 동양(東洋)인 우리나라 한국 땅에, 처음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도(道)이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 한다고 하였다.

날이 갈수록 수운(水運)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니, 드디어 조정(朝廷)의 관리(官吏)들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는 서학(西學) 즉 천주교(天主敎)는 우리 정부가 엄하게 금지하는 종교인데, 오히려 동학(東學)의 가르침이 서학(西學)으로 몰려서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서학(西學)과 다르다고 강조하여도 신변의 위험은 커가기만 했었는데, 1861년 간소한 차비를 하여 전라도 쪽으로 몸을 피하였다가. 이듬해인 1862년 3월에 전라도 남원(南原)에서 경주(慶州)로 돌아왔다.

그의 제자(弟子) 중에서 최경상(崔慶翔: 1827~1898)을 남달리 사랑하고 믿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뒷날 동학(東學)의 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 號: 海月)이었다.

그 이후 동학(東學)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자 소문도 점점 커져 관리(官吏)들의 지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1862년 9월에 경주(慶州) 진영(鎭營)에

서 수운(水運) 선생을 체포하게 되었다.

수운(水運) 선생이 이술(異術)로써 사람들을 속인다다는 혐의(嫌疑)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갇힌 지 며칠도 안 되어 수백 명의 제자(弟子)들이 몰려와 수운(水運) 선생의 가르침은 민속(民俗)을 해(害)하지 않는다고 석방(釋放)을 요구하자, 뜻밖에도 진영(鎭營)에서는 따르는 제자(弟子)들이 많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음을 알고 무죄(無罪)로 석방(釋放)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학(東學)의 교도가 크게 늘어가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동학의 교세(敎勢)가 너무 커져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동학(東學)에 대한 정책을 신중히 제고(提高)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863년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가 왕명(王命)을 받들고 몰래 경주(慶州)를 향해 출발하였다. 곧 조정은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급히 보내어 처리하는 방법을 세웠는데. 이때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수운(水運) 선생이 있는 곳을 몰래 찾아가서 양유종(樑有豊) 등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 형편을 살피게 하고는, 12월 9일 밤에 30여명의 교졸(校卒)을 주어 수운(水運) 선생의 거처(居處)를 습격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운(水運) 선생과 그의 교도(敎徒) 23명이 한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마침 철종 임금이 돌아 가셨으므로, 수운(水運) 선생을 대구(大邱) 감영에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니 1864(갑자)년 1월 6일 대구 감영에 도착한 수운(水運) 선생은 이곳에서 심문(審問)을 받았다.

이해 3월 10일에 효수형(梟首刑)으로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고 순교(殉敎)의 피를 흘렸다. 이때 수운 (水運)선생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해월유록 제14장 아리랑 고개 2 육도삼략과 기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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