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水運) 선생은 1824년 10월 28일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제우(濟愚)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건져 내려는 결심을 다짐하기 위해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전(前)의 이름은 제선(濟宣)이고 호는 수운(水運)이다.
17세에 아버지를 여위고 26세 때인 1859년 10월에 처가에 있던 처자를 거느리고, 아버지가 남긴 고향의 구미산 밑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운(水運) 선생은 이때에 제우(濟愚)라는 이름을 고쳤으며, 1860(庚申)년 4월 5일 어떤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통하게 되었는데, 곧 몸이 마구 떨리고,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보통 이 날짜를 동학(東學)이 태어나게 된 날짜로 삼는다.
이후로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져서 수운(水運) 최제우(崔濟愚)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수운(水運) 선생은 자신의 가르침이 만고(萬古)에 없는 새로운 도(道)라 하며, 동학(東學)이라 불렀다.
서양(西洋)이 아니라 동양(東洋)인 우리나라 한국 땅에, 처음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도(道)이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 한다고 하였다.
날이 갈수록 수운(水運)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니, 드디어 조정(朝廷)의 관리(官吏)들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는 서학(西學) 즉 천주교(天主敎)는 우리 정부가 엄하게 금지하는 종교인데, 오히려 동학(東學)의 가르침이 서학(西學)으로 몰려서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서학(西學)과 다르다고 강조하여도 신변의 위험은 커가기만 했었는데, 1861년 간소한 차비를 하여 전라도 쪽으로 몸을 피하였다가. 이듬해인 1862년 3월에 전라도 남원(南原)에서 경주(慶州)로 돌아왔다.
그의 제자(弟子) 중에서 최경상(崔慶翔: 1827~1898)을 남달리 사랑하고 믿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뒷날 동학(東學)의 2대 교주가 된 최시형(崔時亨, 號: 海月)이었다.
그 이후 동학(東學)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자 소문도 점점 커져 관리(官吏)들의 지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1862년 9월에 경주(慶州) 진영(鎭營)에
서 수운(水運) 선생을 체포하게 되었다.
수운(水運) 선생이 이술(異術)로써 사람들을 속인다다는 혐의(嫌疑)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갇힌 지 며칠도 안 되어 수백 명의 제자(弟子)들이 몰려와 수운(水運) 선생의 가르침은 민속(民俗)을 해(害)하지 않는다고 석방(釋放)을 요구하자, 뜻밖에도 진영(鎭營)에서는 따르는 제자(弟子)들이 많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음을 알고 무죄(無罪)로 석방(釋放)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학(東學)의 교도가 크게 늘어가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동학의 교세(敎勢)가 너무 커져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동학(東學)에 대한 정책을 신중히 제고(提高)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863년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가 왕명(王命)을 받들고 몰래 경주(慶州)를 향해 출발하였다. 곧 조정은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급히 보내어 처리하는 방법을 세웠는데. 이때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수운(水運) 선생이 있는 곳을 몰래 찾아가서 양유종(樑有豊) 등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 형편을 살피게 하고는, 12월 9일 밤에 30여명의 교졸(校卒)을 주어 수운(水運) 선생의 거처(居處)를 습격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운(水運) 선생과 그의 교도(敎徒) 23명이 한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마침 철종 임금이 돌아 가셨으므로, 수운(水運) 선생을 대구(大邱) 감영에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니 1864(갑자)년 1월 6일 대구 감영에 도착한 수운(水運) 선생은 이곳에서 심문(審問)을 받았다.
이해 3월 10일에 효수형(梟首刑)으로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고 순교(殉敎)의 피를 흘렸다. 이때 수운 (水運)선생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해월유록 제14장 아리랑 고개 2 육도삼략과 기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