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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목대흠 (睦大欽)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 차봉판상운(次奉板上韻)

★ 해월유록 앨범

by 雪中梅 2020. 7. 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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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목대흠 (睦大欽)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차봉판상운(次奉板上韻)

 

 

다산(茶山) 목대흠 (睦大欽) 1575(선조 8)∼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아버지는 이조참판 목첨(睦詹)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160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부응교(副應敎)·집의(執義)를 거쳐, 1612년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공조참판·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32년 예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강릉부사가 되었는데, 민심을 얻어 나중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천성이 고결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홍문관교리(弘文館校里)·지제교 겸 경연시독관(知製敎兼經筵侍讀官)에 추증되었다.

 

인품과 관직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다산 목대흠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연안부사가 되었는데 날마다 쓰는 모든 물종을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서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아서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를 못하였다. 일찍이 게 수백 마리를 큰 단지 속에다 젓을 담가두고서 그것을 조석으로 바치게 하였다. 하루는 주리(廚吏)가 게가 떨어졌다고 아뢰니 그는 “아직도 두 마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주리가 황공히 물러나 단지 속을 뒤져보니 과연 두 마리의 작은 게가 젓국 속에 들어 있었다. 이로부터 공사간(公私間)의 장부에는 털끝만큼도 숨겨진 것이 없었다.

시문에 뛰어났고 저서로 『다산집』이 있다.남양주 평내동에 묘와 묘갈이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국조인물고』; 『조선도서해제』; 『목민심서』; 『사천목씨세보』.

 

 

 

 

 

목대흠[睦大欽]의 묘갈명(墓碣銘) 미수(眉叟) 허목(許穆)

 

다산(茶山) 목공(睦公) 묘갈명

 

공의 휘(諱)는 대흠(大欽)이고 자(字)는 탕경(湯卿)이며 호(號)는 다산(茶山)인데, 성은 목씨(睦氏)로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조선 중종(中宗) 때에 현헌 선생(玄軒先生) 목세칭(睦世秤)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유일(遺逸)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에 대한 일은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 사적 가운데 실려 있다. 이분이 이조 참판(吏曹參判) 목첨(睦詹)을 낳았는데, 명종(明宗)과 선조(宣祖)를 섬겨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공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정건(鄭謇)의 딸이다.

공(公)은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3년(1575년 선조 8년) 2월 무인일(戊寅日)에 태어났는데, 젊어서부터 사부(詞賦)로 명예를 날렸으며, 2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4년 뒤에는 별시(別試)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槐院]에 선입(選入)되었다. 곧이어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으로 옮겼고, 춘방(春坊,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ㆍ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를 거쳐 사가 독서1)(賜暇讀書)하였으며, 뒤에 이조(吏曹)의 낭관(郎官)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책사(冊使)가 올 적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니, 또한 극선(極選)이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통정 대부에 올라 걸군2)(乞郡)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며, 그해에 정부인(鄭夫人)이 죽었고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다음 하동지사(賀冬至使)로 경사(京師)에 갔었는데, 공은 외모가 수려하고 예절이 있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보고서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휼륭한 대부(大夫)이다. 어쩌면 저렇게도 예(禮)를 잘 익혔는가?”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당하여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산관(散官)의 반열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10년을 지내다가,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뒤 으레 시정(寺正)에 강등되었으며, 이어 다시 사가 독서하게 하는 한편 상(賞)을 내려 총애하였다. 다음 해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는 체상(體相)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돌아와서는 의정부 사인[都堂舍人]이 되었다. 적을 평정하고 나서 호종(扈從)한 신하들을 상줄 적에 공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승진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주둔하였는데, 금(金)나라 군사가 사포(蛇浦)를 침범한 것 때문에 노여움을 우리나라에 전가시켜 장차 변란이 있게 되자, 임금은 ‘공이 일찍이 빈접사(儐接使)가 되어 그의 환심을 얻었다’ 하여 가서 화해시키게 하였다. 공이 이르니 과연 크게 기뻐하여 다시 우리를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문금(文錦)ㆍ증백(繒帛)ㆍ진기(珍器)를 주면서 사례하여 보냈다. 복명(復命)하고 나서 선물 받은 물품을 탁지(度支, 호조(戶曹))에 귀속시키도록 주청(奏請)하였으나 임금이 그 물품을 공의 집으로 하사하였다.

공이 당시의 중망(重望)을 얻자 권력자들의 꺼림을 받아 현용(顯用)되지 못하였는데,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외직으로) 나가서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적에는 너그러운 덕으로 관리와 백성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떠난 뒤에 그 고장 사람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우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11년(1638년 인조 16년) 정월 7일에 죽었는데, 향년은 64세이다. 공은 조정에 34년 동안 있었는데, 세 번 옥당에 들어가 교리(校理)에 이르렀고, 간원(諫院)에서는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세 번 이조 좌랑이 되었고, 의정부(議政府)에서는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을 지냈으며, 태복시(太僕寺)ㆍ상의원(尙衣院)의 정(正)이 되었고, 승정원에서는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으며, 병조ㆍ예조ㆍ공조의 참의(參議)가 되었고, 외직으로는 광주(廣州)와 강릉(江陵)에 보임되었다.

공(公)은 말이 적고 침착하기를 좋아하여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고상하고 깨끗하여 득실(得失)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세리(勢利)에 담박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대부인(大夫人)을 섬김에 있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힘썼으며, 대부인의 방을 ‘주경(駐景)’이라 명명하였으니, 옛사람의 ‘해를 아낀다[愛日]’는 뜻을 취한 것이다. 원림(園林)을 만들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두 분과 함께 그 속에서 서로 즐겼고, 혹 취하면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스스로 즐기며 시사(時事)에 대하여는 일체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숙부인(淑夫人) 유씨(柳氏)는 본관이 진주(晉州)인데, 훈련원 정(訓鍊院正) 유해(柳海)의 딸이다. 성품이 자혜로와 집을 잘 다스렸으므로 종족(宗族)이 진심으로 따랐다. 부인은 공보다 한 살이 위인데 공보다 12년 먼저 죽었으며, 향년은 53세이다. 합장(合葬)한 묘는 양주(楊洲) 금촌(金村)의 동쪽으로 향한 기슭에 있다.

공은 적처(嫡妻)의 소생이 없었으므로 종자(從子) 목행선(睦行善)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공이 강릉 부사로 부임하던 해에 상등(上等)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목행선이 두 번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목종유(睦宗儒)이고, 다음 목창조(睦昌朝)는 진사(進士)이며, 다음 목창기(睦昌期)는 직장(直長)이고, 다음 목창명(睦昌明)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참의(參議)가 되었으며, 사위 두 사람은 관찰사 유하익(兪夏益)ㆍ사인(士人) 정광도(鄭光圖)인데, 그중목창명과 사인 정광도의 아내는 후부인(後夫人) 소생이다.

공의 측실(側室) 소생 자녀가 3명인데, 아들은 목양선(睦良善)ㆍ목윤선(睦胤善)이고, 사위는 신숙(申淑)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행운에도 으쓱거리지 않았고 불운하여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말은 않았으나 내심 굳게 세운 바가 있었다.

각주

1) 사가 독서(賜暇讀書) : 조선 시대 나이 젊고 재능이 있는 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일.

2) 걸군(乞郡) : 중앙 관아(官衙)의 관원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이나 고향의 인근 고을 수령(守令)으로 나아가기를 청원하는 일.

 

 

茶山睦公墓碣銘

 

公諱大欽。字湯卿。號茶山。姓睦氏。本泗川人。我中宗世。有玄軒先生世秤。以遺逸召。不起。事在己卯事中。生吏曹參判詹。事明宗,宣祖。爲名臣。於公爲皇考。妣東萊鄭氏。贈兵曹參判謇之女。萬曆三年二月戊寅公生。少以詞賦。致名譽。二十七。擢進士第二名。後四年。別試及第。選入槐院。尋移玉堂。歷春坊,銀臺。賜暇書堂。後以天官郞。兼知製敎。冊使來。爲遠迎從事。亦極選也。壬子。陞通政。乞養爲廣州。其年。鄭夫人歿。旣三年。賀至如京師。公秀而有禮。華人見之嘖嘖曰。賢大夫也。何其習於禮也。當光海政亂。無意仕宦。優遊散班。斥落十年。仁祖反正。例降寺正。仍復賜暇書堂。賜賚以寵之。明年。李适作亂。公爲體相李文忠公元翼從事。還爲都堂舍人。旣賊平。賞扈從群臣。公陞禮曹參議。己巳。都督毛文龍軍椵島。以金兵犯蛇浦。移怒於我。將有變。上以公嘗爲儐得其歡心。令往解之。公至則果大喜。不復疑我。贈文錦繒帛珍器。以謝遣之。旣復命。請以餽遺諸物。歸度支。上賜之家。公旣重於時。爲當路者所忌。不復顯用也。癸酉。出爲江陵。以寬厚得吏民心。去後。其人立遺愛碑。久而不忘云。崇禎十一年正月七日歿。享年六十四。公立朝三十四年。三入玉堂。至校理。諫院爲正言。吏曹三爲佐郞。政府爲檢詳舍人。太僕,尙方爲正。政院至右承旨。參議兵禮工三曹。補外廣州,江陵。公好簡嘿。喜怒不見。雅潔。不以得失動其心。於勢利。泊如也。少孤。事大夫人。務得懽心。名其室曰駐景。取古人愛日之義也。治園林。植花竹。與伯仲二公。怡然相樂於其中。或醉則吟哦自娛。口不言時事。淑夫人柳氏。籍晉州。訓鍊院正海之女也。有慈惠至性。治家克順。宗族歸心焉。夫人長於公一年。先公十二年歿。享年五十三。合葬之。墓在楊州金村東向之原。公無子。以從子行善爲後。公赴江陵之年。登上第。官至觀察使。再娶而生四男二女。男長曰宗儒。次曰昌朝。進士。次曰昌期。直長。次曰昌明。文科參議。壻二人。觀察使兪夏益,士人鄭光圖。其一男一女。後夫人出也。又側室子女三人。男良善,胤善。壻申淑。銘曰。

不訑訑於通。不戚戚於塞。不言而內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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