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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왜 매화(梅花)를 사랑했는가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 해월유록 앨범

by 雪中梅 2020. 7. 13. 18:53

본문

 

 

퇴계는 왜 매화(梅花)를 사랑했는가 ....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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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왜 매화(梅花)를 사랑했는가


http://blog.naver.com/mallian/40009531509

퇴계(退溪)는 왜 매화를 사랑했는가,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가 피는 겨울 섣달 초순에 운명했다.


그는 운명하던 날 아침,

기르던 분매(盆梅)에 "물을 주어라"고 명했다.

이것이 퇴계의 마지막 유언이다.
퇴계는 이토록 매화를 혹애(酷愛)했다.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 등으로 부르며

깍듯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했다.

그래서 때로 의인화시켜 시를 주고받기도 했으며, 매화를 시의 제재로 가장 빈번히 다루었다.


퇴계는 생전에 매화를 제재로 한 시만을 모아 『매화시첩(梅花詩帖)』을 편집해 두기도 했다.

여기에는 90여 수가 실려 있다. 한국의 문인과 학자들 가운데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한국 문헌에서 매화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24년에서다.

「8월, 매화꽃이 피다」라는 기사다. 한겨울에 피어야 할 매화가 8월에 피었으니 이상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삼국사기』의 매화는 국가적인 재액의 징표를 기록한 것이다.


다음으로 매화는 통일신라 말기의 시인 최광유(崔匡裕)의 시에 나온다.

최광유는 견당(遣唐) 유학생 시절,

당나라 친구 집 뜰에 핀 매화를 보고 "뜨락 한 구석에서 섣달의 봄을 독점하고 있네"라고 읊었다.

일찍 피는 꽃으로서의 매화를 취한 것이다.

중국에서 일반화된 상징 '봄의 선도자'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내 고향 시냇가에도 매화나무 있어 / 만리 밖 당나라로 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라는

시구로 보아 당시 신라에서도 매화는 일정하게 관상적(觀賞的)으로 주목되는 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고려 중기에 임춘(林椿),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 진화(陳華) 같은 시인들이 모두 매화를 읊고 있다.

대체로 '봄의 선도자'로서의 매화를 취하여 중국의 매화 관련 전고(典故)를 써서 작품화하고 있어

뚜렷하게 새로운 상징은 파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규보와 진화의 시에 매화가 맑은 향기를 풍기거나 담장(澹粧)한 미녀로 형상화되어 있다.

옥결 같은 살결엔 맑은 향기 아직도 있는/

선약(仙藥)을 훔친 달 속의 항아(姮娥) 몸"은 이규보의  시구이고,

"봄의 신이 뭇 꽃을 물들일 때/ 

맨 먼저 매화에게 옅은 화장을 시켰지 //

옥결 같은 뺨엔 옅은 봄을 머금고 /

흰 치마는 달빛이 서늘해라"는 진화의 시구다.

그러나 향기롭거나 옅은 화장을 한 미녀로서 매화를 형상화한 것은

유교적인 매화 상징의 본령과는 거리가 먼 문예 취향의 것이다.

유교가 아직 심화되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매화가 '봄의 선도자'라는 상징은 그 상징의 생성 계기가 유교에 있다고 해서 유교의 상징일 뿐,  

실제 중국에서는 진작부터 많이 문예 취향화되었다.

이러한 예는 앞의 고려 중기 시인들의 작품에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일연(一然)은 이렇게 문예 취향화된 상징을 다시 불교적 사실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에 불교가 모례(毛禮)의 집을 통해 처음으로 전해진 사실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금교(金橋)엔 눈이 얼어 아직 풀리지 않아 /

계림(鷄林)에 봄빛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

기특도 해라,

봄의 신 꾀도 많아서 /

모례의 집 매화에다 먼저 손을 썼네."

문예 취향화된 '봄의 선도자'로서의 매화 상징은 이렇게 '불교의 최초 도래'를 상징하고 있다.

유교의 심화는 도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3세기 말부터의 도학 수용은 매화 상징을 보다 유교적으로 만들어 갔다.

일련의 고려 말기 유학자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곡(李穀)은 "우물 밑 양기 돌아/ 가지에 꽃 기운 움직이네"로 심동(深冬)에 피는 매화를 양기의 되돌아옴으로 읊었다.

이집(李集)은 "이미 주인과 함께 희고 깨끗하니/ 복사꽃 오얏꽃 고울 때를 따를까 보냐"라고 하여

속류(俗類)와 어울리지 않는 매화의 고결한 인품을 읊었다.

이색(李穡)은 "지축(地軸)이 돌아 한 점 봄/ 밝은 창 아래 문득 은은한 향기 새롭네"라고 하여

매화의 착화(着花)를 동지에 양기의 되돌아옴으로 우회적으로 읊었다.

정몽주(鄭夢周)는 "스스로 향기로운 덕을 안고 있으니 /

풍설이 몰아침을 시름할까 보냐"라고 하여 역경을 견디어 내는 선비를 상징했다.

정도전(鄭道傳)은 「매천부(梅川賦)」를 지어 당시의 선비 하유종(河有宗)의 고결한 인품을

'눈과 달빛으로 청결한 섣달 밤의 냇가에 맑은 향기를 풍기며 서 있는 매화'로 표현했다.

그는 또 "천지간에 음기(陰氣)가 꽉 차 있어 /

어느 곳에서 봄빛을 찾는담// 기특하기도 해라,

저토록 수척한 것이/ 얼음 서리 물리쳐 내네"라고 하여

'양기의 전령사'로서의 매화를 읊어, '절조가 빼어난 사람'을 상징했다.



퇴계와 매화 시

역사적으로 도학의 수용 과정에서 매화 시의 창작 빈도가 높았듯이 퇴계 개인에게서도

매화 시의 창작 빈도는 그의 도학에 대한 몰입 과정과 유사하다.

즉 100여 수의 매화 시 중 33세 때 2수를 지은 것 외에는 모두 그가 도학에 몰입해 가기 시작하던

중년 이후의 창작이다.

그것은 또한 매화를 사랑하고 여러 수의 매화 시를 남긴 송나라의 주희(朱熹)에 몰입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같은 사실들은 매화와 퇴계의 도학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100여 수의 매화 시에서 퇴계는 매화를 실로 다면적으로 묘사·서술했다.

물론 퇴계는 도산서당(陶山書堂)에 소나무·국화·대나무와 함께 매화를 심어 두고 '절우사(節友社)'라

명명하고,



"내 이제 매형(梅兄)까지도 아울러서 풍상계(風霜契)를 만드니
/ 절개와 맑은 향기 흠뻑 알겠네"



라고 종래의 관용적인 매화 상징 즉 '절조가 빼어난 사람', '고결한 기품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상징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매화 시는 이런 외적인 규정성으로 정리된 상징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 있다.
말하자면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임을 두고 작품을 쓰듯 갖가지 사연이 갖가지 방식으로

토로되었다.



여기에는 퇴계의 매화에 대한 대전제,



즉 퇴계에게 매화가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임이 되게 된 소이연이 있었다.

그것은 매화가 '청진(淸眞)'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추구하는 청진은 '인간 내면 세계의 청진'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퇴계에게 매화 상징은 본질적으로 '절조가 빼어난 사람', '고결한 기품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청진'은 바로 이런 사람의 내면 세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44세 때 (퇴계선생문집 제1권) 매화를 읊은 작품을 보자.



O 막고산(藐姑山) 신선님이 눈 내린 마을에 와 / 藐姑山人臘雪村
O 형체를 단련하여 매화 넋이 되었구려 / 鍊形化作寒梅魂

O 바람 맞고 눈에 씻겨 참 모습 나타나니 / 風吹雪洗見本眞
O 옥빛이 천연스레 속세를 뛰어났네 / 玉色天然超世昏

O 이소(離騷)의 뭇 화초에 끼여들기 싫어하고 / 高情不入衆芳騷
O 천년뒤에 고산(孤山)에 한 번 웃음 웃네." / 千載一笑孤山園


막고산(藐姑山) 신선(神仙)님은 살결이 빙설(氷雪) 같고,

몸이 가볍고 보드랍기가 처자 같다는 신선이다.

이러한 신선(神仙)이 그것도 눈 내린 마을에 와서 매화로 화신했다고 한 문맥에서

매화는 청정(淸淨) 그 자체로 표상되어 있다.



그리고 천연스런 옥빛(玉色)으로 이소의 뭇 화초에 끼여들지 않고

고산(孤山:임포가 살던 곳으로,

이 시에서는 매화의 고고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였음)에 피어 있다는 문맥에서

매화의 고고한 자태가 표상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매화(梅花)는 퇴계에게

그가 추구해 마지않던 '인간 내면의 청진(淸眞)'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퇴계가 매화(梅花)로 '청진(淸眞)'을 상징한 이면에는

그의 도학이 추구해 마지않던 이(理)의 세계가 있다.
퇴계가 도학에 몰입해 갈수록 매화 시의 창작 빈도가 높아간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퇴계는 매화의 청진함에서 이(理)의 세계의 청진(淸眞)함을 본 것이다.
퇴계는 이(理)의 세계를 "깨끗하디 깨끗하고 맑디 맑아"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매화의 청진함으로 결국은 '이(理)의 세계',

그것도 특히 '인간 내면의 이의 세계'를 상징하려 했던 것이다.

 


매화가 도선(陶仙:퇴계)에게 답한 작품 한 수를 보자.(퇴계선생문집 제5권)



들으니 도선도 우리마냥 쓸쓸하더군요 / 聞說陶仙我輩涼

임 가실 때를 기다려 천향(天香)을 풍기리다 / 待公歸去發天香

임이여 원컨대 대할 때나 그릴 때나 / 願公相對相思處
옥설(玉雪)과 청진(淸眞)을 둘이 함께 잘 간직하도록." / 玉雪淸眞共善藏


마지막 시구에 매화가 도선에게 하고자 하는 다짐이 분명하게 시사되어 있다.

매화와 이(理)를 직접적으로 상징의 매개와 그 취의(趣意)로 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할 경우

이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데 엄청난 장애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진(淸眞)'을 통해 우회적으로 상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매화(梅花)는


한국에서 '천심(天心)'과 '이(理)'라는 두 가지 유교적인 상징을 낳았다

퇴계 이후 적어도 유교에서는 매화를 매개로 한 상징이 더 파생된 것 같지는 않다.

유교에서 어떤 관념이나 덕성(德性)을 화훼로 상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심미성으로 전화되고,

심미성이 도덕성으로 전화된다는 미선일치(美善一致)의 관점에서다.

인간의 도덕성 함양과 조상 숭배라는 유교의 두 가지 교의의 흐름 가운데

인간의 도덕성 함양에는 이런 사유의 기제(機制)가 스며 있다. 그러므로 매화는, 나아가 세한삼우나

사군자는 심미적으로 아무리 분방한 예술적 취향으로 표방한 그림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의 유교적 상징, 곧 도덕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이동환



츨처 : http://www.haksodo.com/news-96.htm


퇴계선생문집 제1권 원문 원문이미지 한국고전번역원 새창띄우기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K%26seojiId=kc_mk_k002%26noUpSeoji=%26gunchaId=av001%26muncheId=01%26finId=007%26guboonNodeId=seoji%26NodeId=mk_s_all


시(詩)

호당(湖堂)에 매화가 3월에 비로소 피었기에 동파(東坡)의 운을 써서 짓다

2수(二首) ○ 봄에 소명(召命)에 나아간 뒤에 지은 것이다.


내가 옛날 남방에서 매화촌을 찾았더니 / 我昔南遊訪梅村
아지랑이 매일같이 시혼(詩魂)을 녹이었네 / 風烟日日銷吟魂
땅끝에서 홀로 맞아 경국색을 찬탄하고 / 天涯獨對歎國艷
역로에서 부치매 어둔 세상 슬퍼했네 / 驛路折寄悲塵昏
서울에 온 이래로 간절히도 그리워서 / 邇來京輦苦相憶
맑은 꿈은 밤마다 전원으로 날아갔네 / 淸夢夜夜飛丘園
여기가 서호일 줄 어떻게 알았으랴 / 那知此境是西湖 **
우연히 서로 만나 한 번 웃음 정다워라 / 邂逅相看一笑溫
꽃다운 맘 고즈넉이 늦은 봄에 피어설랑 / 芳心寂寞殿殘春
옥빛 자태 아름다이 돋는 해를 맞이하네 / 玉貌婥約迎初暾 **
학을 짝한 높은 선비 산에서 나오지 않고 / 伴鶴高人不出山 **
연 사양한 정숙한 여인 항상 문을 닫고 있네 / 辭輦貞姬常掩門
늦게 피어 복사 살구 누르게 한 하늘의 뜻 / 天敎晩發壓桃杏 **
묘한 의미 시인인들 다 말하지 못하리니 / 妙處不盡騷人言 **
아름다운 그 모습 철석간장 무슨 소용 / 媚嫵何妨鐵石腸 **
병든 몸이 술병 들고 찾아감을 사양 말라 / 莫辭病裏携甖罇

막고산의 신선이 눈 내리는 마을에서 / 藐姑山人臘雪村 **
수련으로 변화하여 겨울에 피는 매화의 혼이 되었다오 / 鍊形化作寒梅魂
바람 불고 눈에 씻겨 본 모습을 나타내니 / 風吹雪洗見本眞
천연의 옥빛 자태 어둔 세상 초탈했네 / 玉色天然超世昏
이소경 뭇 꽃 중에 높은 정조 들지 않고 / 高情不入衆芳騷
고산의 동산에서 천년 뒤에 한 번 웃네 / 千載一笑孤山園 **

세상 사람 몰라보니 심제량과 같단 말가 / 世人不識嘆類沈 **
나 홀로 기뻐하네 온백설자 만난 듯이 / 今我獨得欣逢溫 **
정신 맑고 뼈가 차매 스스로 깨닫나니 / 神淸骨凜物自悟
지극한 도 거짓없이 노을 햇빛 먹는다네 / 至道不假餐霞暾 **

어젯밤 꿈속에서 흰옷 입은 선인 만나 / 昨夜夢見縞衣仙 **


하얀 봉새 함께 타고 하늘문에 날아가서 / 同跨白鳳飛天門 **


섬궁에서 옥절구로 찧은 약을 달랬더니 / 蟾宮要授玉杵藥 **
직녀가 인도하여 항아에게 말하더라 / 織女前導姮娥言
깨어나매 그 향기가 옷소매에 가득하여 / 覺來異香滿懷袖
달 아래서 가지 잡고 술병을 기울인다 / 月下攀條傾一罇 **




[주D-001]역로(驛路)에서 부치매 : 남조(南朝) 송(宋)의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 한 가지를 꺾어 역사(驛使)를 통해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며 아울러 시를 지어 전한 고사가 있다. 《太平御覽 卷970 荊州記》
[주D-002]서호(西湖) : 송나라 임포(林逋)가 서호에 살면서 매화를 많이 심고 매화시를 지어서 이름이 났다.
[주D-003]학을 …… 선비 : 임포(林逋)가 처자도 없이 살면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D-004]연(輦) …… 있네 : 한 성제(漢成帝)의 후궁(後宮) 반희(班姬)가,

임금이 한 수레[輦]에 타라는 것을 사양하였다. 뒤에 버림을 당하여 장신궁(長信宮)에서 문을 닫고 적막한 생활을 하였다.
[주D-005]막고산(藐姑山)의 신선 :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선인(仙人)이 있는데, 살결이 빙설(氷雪)같이 희고 깨끗하며 아름다워서 처자(處子)와 같다 하였다. 《莊子 逍遙遊》
[주D-006]이소경(離騷經) …… 않고 :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에 온갖 초목을 나열하여 썼으나, 매화는 거기에서 빠졌다.
[주D-007]고산(孤山) : 임포가 서호의 고산에 살았다.
[주D-008]세상 …… 말가 : 심제량(沈諸梁)이 공자가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자로(子路)에게 물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述而》
[주D-009]나 …… 듯이 : 공자가 온백설자(溫伯雪子)와 만나서,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눈으로 보고 도(道)를 알았다 한다. 《莊子 田子方》
[주D-010]지극한 …… 먹는다네 : 신선은 수련할 때에 노을을 먹고 일광(日光)을 마신다 한다.

 


퇴계선생문집 제5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시(詩)

분매가 답하다

도산(陶仙) 내 벗이 서늘하게 있다 하니 / 聞說陶仙我輩涼


공이 돌아오거든 천향(天香)을 피우리라 / 待公歸去發天香


원컨대 공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제 / 願公相對相思處


옥설의 맑고 참됨(淸眞) 모두 고이 간직하라 / 玉雪淸眞共善藏

[주D-001]도산(陶山) 내 벗 : 퇴계가 도산에 매화ㆍ국화ㆍ연꽃을 심어 두고 절우사(節友社)라 하였다.

 

 





 


광야(曠野) - 이육사(李陸史)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 이육사(李陸史)



육사는 1904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육사(李陸史)는 본관이 진성(眞城)이고, 본명은 이원록(源祿)·이원삼(源三)이며, 자는 태경(台卿), 호가 육사(陸史)이다. 1904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묘소는 도산면 원촌리 이육사문학관 뒷산에 있다. 보문의숙(寶文義塾)의 초대 교장을 지낸 이중직(李中稙)이 할아버지이다.


이육사(李陸史, 1905-1944) 본명 이원록(李源祿) 후에 이활(李活)로 개명. 생전 20회에 가까운 옥살이하다가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생애 마침. 김광균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잠시 활동함. 대표작으로 ‘광야’ 외에도 ‘절정’, ‘청포도’, ‘꽃’, ‘황혼’ 등이 있음. 작품 경향을 보면, 남성적 어조의 강렬함과 대결 의지로 민족 의식을 담아 내어 일제하의 대표적 저항 시인의 면모를 보여 줌. 유고 시집으로 <육사시집>이 1946년에 나왔음.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이육사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 매화는 청림도사 정도령의 별칭.*

 

 평해황씨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 앞마당 매화

평해황씨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 앞마당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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