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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개벽경에 대하여

■ 천지개벽경

by 雪中梅 2020. 7. 1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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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개벽경에 대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대현(大賢) 이중성(李重盛) 선생의 필생의 역저(力著) 대개벽경이 지난 9월 3일 증산종단의 성지(聖地) 구릿골 약방에서 구성된 대개벽경 간행위원회에 의해서 대순절(大巡節:음력 9월 19일)에 인쇄에 붙여지고 오는 12월중에 출판기념회를 갖고 일반에 배부될 예정이다. 경술(庚戌 1970)년 증산신도친목회 결성이래 교단간의 친목이 두터워지면서 이중성선생의 유고 대개벽경이 간행된다면 대순전경(大巡典經)과 쌍벽을 이룰만한 증산종단의 새로운 경전이 될 것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으나, 그 유고의 일부를 몇몇 사람이 보았을 뿐이어서 대개벽경이 언제 간행되느냐가 화제거리가 되어 왔었다. 대개벽경의 간행에 대한 여러가지 궁금중을 풀기 위하여 저자 이중성선생의 약력 및 대개벽경의 내용 등을 아래에 소개한다.

이중성선생은 지금부터 91년전 정유(丁酉 1897)년 음력 4월29일 경남 기장군(機張郡:지금의梁山郡) 기장면 동부리(東部里)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은 11세에 한일사전을 6개월 읽고 암송한 천재로 14세에 경남도지사의통역관이 되어 이후 3년간 독립군에게 왜경(倭警)의 기밀을 넘겨 주다가 발각되었다. 임자(壬子1912)년 6월에 체포되어 부산경찰서에 갇힌 선생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1년 반 동안 매일 피빨래를 뭉쳐내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연관자를 불지 않자 미성년자라는 맹목으로 풀려 나셨다. 이 뒤 독립운동을 계속한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김구(金九)선생으로부터 당시 국내의 최대 민간조직인 보천교의 종교활동을 독립운동으로 전환시키라는 밀지(密旨)를 받고 무진(戊辰 1928)년 5월에 국내로 잠입하여 그 해 음력 12월 22일 차월곡(車月谷)교주를 만나셨다.

차교주는 선생에게 보천교의 수호사장(修好司長)을 맡기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으나 보천교의 신로(信路)를 따를 수 없었고 보천교의 독립운동동참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천주(天主)이신 증산대성을 일심으로 믿고 수도에 힘쓰면서 경전의 편술에 전념하셨다. 선생은 스스로 태을주(太乙呪)를 3000만독(萬讀) 서전서문(書傳書文)을 50만독(萬讀) 그 밖의 주문(呪文)을 10만독(萬讀)하는 것이 생애의 서원이라 일로정진(一路精進)하셨다. 해방 이후 이승만 김규식 신익회등 여러분의 정계진출(政界進出)권유를 물리치고 증산대성의 재세시의 자취를 찾고 종도들을 탐방하여 자료를 수집하며 천지공사의 내용과 장소 시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무진(戊辰1928)년부터 무술(戊戌 1958)년 음력11월 28일 선화하시기까지 30년의 세월을 여기에 바치셨다.
선생께서는 선화하시기 전에 유훈하시기를 「이 대개벽경의 역해(譯解)는 정덕군자(正德君子)를
찾아서 맡기라」하셨다. 한문본(狹文本)의 대개벽경은 수많은 인사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옥수(玉壽) 인수(仁壽) 용수(龍壽)등 삼남매가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선생 선화후 무려 30년만에 이상비(李相斐)박사에게 정묘(丁卯 1987)년 초여름에 수교(手交)되어 1년여에 걸친 역해(譯解)를 마치고 선생이 편술을 시작한지 60년만인 오늘에 드디어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책의 부피는 원고지 1천 9백매로현 대순전경보다 약간 두꺼운 5백여 쪽이 될 것이다.



- 월간 천지공사 창간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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