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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중계(壺中界)란, 별천지(別天地), 비인간(非人間), 선경(仙境), 술그릇속, 바가지속,신선(神仙)이 머무는 곳..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 해월유록 요점

by 雪中梅 2020. 7. 12.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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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중계(壺中界)란, 별천지(別天地), 비인간(非人間), 선경(仙境), 술그릇속, 바가지속,신선(神仙)이 머무는 곳..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

 

 

황씨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으로 풍수학상 강릉 이남 최고의 명당

 

 

 

http://blog.naver.com/mjwon35 (해월 황여일의 예언 / 네이버 블로그)
http://cafe.daum.net/dkdehd63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3권 16장 74편 1

 

得見豚允書中有詩 是夕無寐遂於枕上疊和

득견돈윤서중유시 시석무매수어침상첩화

二首 回寄允兒 以爲林泉卜築之南針云

이수 회기윤아 이위림천복축지남침운

 

우룡사하립암간(牛龍寺下立巖間)

우룡사(牛龍寺) 아래에는 조용한 석굴이 있으니,

 

몽매평생기왕환(夢寐平生幾往還)

평소 잠도 자며 꿈도 꾸며 자주 갔다 돌아오는 곳이다.

 

곡호임천원득직(谷號林泉爰得直)

()을 일러 임천(林泉)이라 하는데,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되었으니,

 

옹칭해월숙쟁한(翁稱海月孰爭閒)

해월을 부르며 누군가가 당겨 맞이하는데 한 노인이구나.

 

청류굴곡엄릉뢰(淸流屈曲嚴陵瀨)

맑게 흐르는 물이 이리저리 굽고 꺾이며 차가운데 더하여 물살은 빠르고,

 

열수참치사조산(列岫參差謝眺山)

물러나 멀리 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연이어 있구나.

 

처세처향구매책(處世處鄕俱昧策)

이 세상과 고향에서 살아나가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인지라,

 

휴가종차노운관(携家從此老雲關)

집을 떠나서 이 노인을 쫓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도다.

 

 

2수

 

풍진분주무문간(風塵奔走武文間)

속세(風塵)의 문관과 무관사이(文武間)분주(奔走)히 지내다가,

 

모경방지권조환(暮境方知倦鳥還)

나이가 들어서야 바야흐로,

고달픈 새는 돌아온다(鳥還)는 것을 알겠구나.

 

자한오향편벽애(自恨吾鄕偏僻隘)

스스로 한()하는 것은,

내 고향 마을이 외져 막혀 있는데,

 

인언차토략관한(人言此土略寬閒)

사람들이 말하길,

이 곳은 대체로 넓고 한가하며,

 

 

소청현시호중계(小靑縣是壺中界)

 

작지만 맑고 고요한 고을로,

 

이 곳이 호중계(壺中界)라 하는구나.***

 

 

태백지위획리산(太白支爲畵裏山)

태백(太白)산의 한 가지로 나누어진,

모태(母胎)가 되는 산으로,

 

 

시식건곤간비의(始識乾坤慳秘意)

 

처음으로 건곤(乾坤)을 굳게 감춰 둔,

 

신(神)의 뜻을 알게 되었다.***

 

 

시문수설주의관(柴門雖設晝宜關)

 

비록 사립문(柴門)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낮에는 마땅히 관통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제목 - 장남인 중윤(中允)의 글 중에 시(詩)를 보고서,

저녁 침상에서 잠 못들며 첩화시(疊和詩) 두 수를 지어,

돌아와 윤아(允兒:中允)에게 주며 임천(林泉)에서

터를 가려 집을 짖는데 정남향으로 하라고 이름.

 

 

이 시()1618(광해 10, 戊午)8월에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다 관직을 물러나,

고향집으로 돌아와서는 해월헌(海月軒) 만귀헌(晩歸軒)으로 고쳐 현판을 걸었으며,

그 이후 지은 시()이다.

 

 

해월 (海月) 선생은 우룡사(牛龍寺) 아래에 바위 석굴이 있는데,

 

이 곳을 임천(林泉)이라 하고,

 

이 곳에서 한 노인을 만나서 모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노인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 구절은 없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하자 한 사람이 말하였다.

 

"그 글 내용으로 보면,

이 세상과 고향 마을에서 잘 살고자 꾀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여,

이 노인을 따라 구름이 낀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신선(神仙)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자 명산 선생은 시인(是認)도 부인(否認)도 하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두 번째 시()를 보면,

해월 선생이 속세(俗世)에서 무관(武官)과 문관(文官)으로 분주히 살아오다,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고달픈 새는 돌아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게 한()하는 것은,

고향 마을이 도회지와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으로 꽉 막혀서,

이 곳 사람들은 좋은 스승을 만날 수도 없고,

아무리 똑똑해도 배경이 없으니,

중앙(中央)에 나아가 출세(出世)할 수도 없는 울진 사람들을 보고

매우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곳 고향 마을은 비록 작지만,

 

맑고 고요한 마을로 이 곳은 호중계(壺中界)라 한다고 하였다.***

 

이 곳은 태백산(太白山)의 한 가지로 나누어진 모태(母胎)가 되는 산이며,

 

이 곳은 하늘이 비밀(秘密)에 부쳐둔 숨겨 둔 곳인데,

 

해월 선생도 비로서 그 신()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이 곳은 신성(神性)한 곳으로,

 

아무나 출입(出入)시켜서는 안 되는 곳이라,

 

속이 탄다고 하였다.***

 

 

차라리 외부(外部)와의 교제(交際)를 끊고,

 

문을 만들어 닫아 걸어서 출입(出入)을 막고 싶은데,

 

그러나 어찌 대낮까지 사람들을 드나들 수 없게 할 수야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에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사람들이 이상스럽게 생각하여,

()이 숨기는 뜻을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쉬우니,

답답한 심정(心情)을 시()로써 남긴 것이다."

라고 설명하자 한 사람이 질문하였다.

 

"호중계(壺中界)란,

별천지(別天地),

비인간(非人間),

선경(仙境),

술그릇속,

바가지속이라는 말로,

한마디로 신선(神仙)이 머무는 곳이란 말이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理想世界)라고 알아왔지만,

사실은 이 시에서는

호중계(壺中界)가 바로

해월(海月)선생 자신의 고향,

즉 해월(海月)선생 자신의 집이 호중계(壺中界)라 한 것이다.

 

토정(土亭)선생의 조카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은,

이를 꿰뚫어보고 사동기(沙銅記)를 남긴 것이다,

바로 여기가 태백산(太白山)의 한 가지로서 모태(母胎)가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즉 금강산(金剛山) 태백산(太白山)의 정기(精氣)가 모여 있는 정혈처(正穴處)인 것이다.

 

하늘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우주(宇宙)를 개벽(開闢)하여야 하는데,

 

개벽(開闢)의 주인공인 건곤(乾坤 : 정도령)

 

즉 하나님의 아들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정기(精氣)를 축적해 감추어 둔 곳이 바로 이 곳이니,

 

어느 누구도 출입( 出入)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지(聖地)라는 것이다.

 

그러나 밤에는 사립문을 걸어서 닫으면 되겠지만,

낮에는 그렇게 할수 없으니 통과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내용이다."

 

라고 하자 한 사람이 질문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의 생가(生家)를,

호중계라 하고 신선(神仙)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하여 주십시오."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2권 12장 51편에,

 

차이청강 해월헌운(次李淸江 海月軒韻)

 

소헌탄진일창명(小軒呑盡一滄溟)

조그만 정자(小軒)이나,

창해(滄海)한 번에 마셔 없앨 수 있고,

 

량월장풍진차정(凉月長風盡此亭)

맑고 깨끗한 달(凉月)과 장풍(長風)이,

이 정자에서 그치는데,

 

불유적선유일구(不有謫仙留逸句)

천상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이,

(남의) 훌륭한 구절을 엿보겠는가?****

 

좌래안득상금령(坐來安得爽襟靈)

앉아서 찾은즉,

밝고 빛나는 옷을 입은 신()이르는 도다.****

 

 

이 시()는 이청강(李淸江) 선생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해월헌(海月軒)에 대하여 읊은 시()이다.

해월헌(海月軒)이란,

해월(海月) 선생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亭子) 이름이다.

 

이 해월헌(海月軒)은 해월(海月)선생이

1588(선조 21, 戊子)4월 고향에 돌아와서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는데,

현판(懸板)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생이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약포(藥圃) 정탁(鄭琢),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 선생 등등,

수 많은 인사(人士)들이 찬양(讚揚)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해월헌(海月軒)은 조그마한 정자(亭子)이지만,

단 한() 번에, 넓고 푸른 바다(滄溟)를 마셔버릴 수 있고,

맑고 깨끗한 달(凉月)과 장풍(長風)이 정자에 와서는 머문다고 하였다.

 

또한 천상(天上)에서 귀양온 신선(神仙)이,

남의 아름다운 구절을 엿보고 흉내 내어,

큰소리나 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해월(海月) 선생이 이 정자에 앉아서 신선(神仙)을 찾은즉,

밝게 빛나는 옷을 입은 신선(神仙)이 온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시()에서,

여러 가지 의미(意味)를 시사(示唆)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자신이 신선(神仙)대하여 하는 말은,

이름이 나 있는 문장가(文章家)들이 써 놓은 글이나 보고 흉내 내어

지껄이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해월 (海月)선생이 신선(神仙)을 찾으면,

밝게 빛나는 옷을 입은 신선(神仙)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 남들이 신선(神仙)을 보지도 못하고,

옛날 책이나 남들이 신선(神仙)에 대하여 써 놓은 글을 보고

흉내 내어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이 직접 신선(神仙)을 찾으면,

신선(神仙)이 나타나서 신선(神仙)과 더불어 같이 지낸다는 말이다.

 

그러면 신선(神仙)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자세히 알아보자.

 

우리는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411편을 보면

더욱 확실(確實)하게,

그 신선(神仙)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유소부이(與有巢父耳)

소부(巢父)와 같이 귀를 씻기보다는,

 

녕위할관롱(寧爲鶡冠聾)

차라리 할관(鶡冠)이나 하고, 귀가 먹겠으며,

 

여위기자노(與爲箕子奴)

기자(箕子)와 같이 ()이 되기보다는,

 

녕위수옥용(寧爲樹屋傭)

차라리 통나무집을 짓고, 품팔이를 하겠다.

 

불문불수세(不聞不須洗)

듣지 않으니, 모름지기 씻을 필요도 없고,

 

불출불수광(不出不須狂)

(벼슬길에)나가지 않으면, 모름지기 미친 듯이 떠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소이현달인(所以賢達人)

이런 까닭에 현명하고 사물에 통달한 사람(賢達人)이라면,

 

행장순천상(行藏順天常)

세상에 나아가 도(道)를 행하는 일과 물러나 숨는 일(行藏)은,

천명을 따르는 것(順天)이, 상식(常)이다.

 

명관무위초(冥觀無爲初)

어리석게도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즉지유위후(卽知有爲後)

다시 말해 나중에는 할 수가 있음을 알겠구나.

 

헌앙천지간(軒昻天地間)

의기 양양(軒昻)하게, 천지 사이(天地間)에서

 

독여지도우(獨與至道友)

내가 홀로(), 지극한 도(至道)와 벗()하고 있지만,

 

욕형불가형(欲形不可形)

드러내고 싶어도(欲形), 드러낼 수 없고(不可形),

 

욕명불가명(欲名不可名)

누구라고 지칭하고 싶어도(欲名), 지칭할수가 없구나(不可名).

 

왕왕창해수(汪汪滄海水)

깊고 넓은(汪汪) 푸른 저 바닷물은(滄海水),

 

난탁역난청(難濁亦難淸)

탁해지기도 어렵지만(難濁), 역시 맑아지기도 어려운 것이로다(亦難淸).

 

 

이 시()1617(광해 9, 丁巳)1262세 때 지은 시()인데,

그 당시 해월(海月)선생은 동래(東萊) 부사(府使)로 있었다.

 

이 때 폐비(廢母: 인목대비)의 논()이 일어났으며,

또한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서는 한 당파(黨派) 속에서 패가 갈리면서,

여러 각료들의 벼슬을 빼앗고 멀리 내쫓는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를 쓰고 즉시 사직서(辭職書)를 제출하고는 고향에 돌아갔다.

 

조정(朝廷)에서는 계속 근무(勤務)하기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는 돌아간 것이었다.

 

소부(巢父)란 요()임금 때의 고사(高士),

()임금이 천하(天下)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사양(辭讓)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천하(天下)를 맡기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귀가 더럽혀졌다 하여,

냇가로 가서 귀를 씻었다고 전해 오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해월(海月) 선생이 의기양양하게 한 마디를 하였는데,

이 넓고 넓은 천지(天地) 사이에서,

홀로() 지극한 도()와 벗()하고 있다고 하였다.

 

도(道)와 벗(友)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정도(正道)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동행(同行)한다는 말인 것이다. ****

 

그러니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수가 없고,

누구라고 지칭(指稱)하고 싶어도 지칭(指稱)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깊고 넓은 저 푸른 바닷물은 탁해지기도 어렵고

또한 맑아지기도 어렵다고 한 것이다.

바로 해월(海月) 선생이 벗()하고 있는 지극한 도()가,

변하지 않는 진리인 바다()라고 은연중에 밝히는 것이다.

 

바다(海)란,

진인(眞人) 정도령을 뜻하는 별칭(別稱)이라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밝힌 것이다.***

 

 

해월유록말씀(中)

 

 

임천가(林泉歌)

 

임천(林泉)은 초당(草堂) 삼고

만고일월(萬古日月)을 곁에 두고

금주(金主)야 술 부어라

거문고 비파(琵琶) 양금에

새 줄을 골라

남풍가(南風歌)로 화답(和答)할 때

만고강산(萬古江山)이 모두 지상선(地上仙)이로구나.

 

임 잃고 임 생각할 제

밤마다 꿈 몽(夢)자요

생각 념(念)자 탄식 탄(嘆)자 하니

어깨 너머 눈물 루(淚)자

우리도 언제나 정든 님 만나서

웃음 소(笑)자 즐거울 락(樂)자로

세월을 보낼거나.

 

바람 불고 비 오실 줄 알면

학창의(鶴衣) 지어 줄에다 걸까

임이 정녕 오실 줄 알면 문을 걸고 잠을 잘까

차후로 임 오신다는 소식이 풍월에 일러 들리거든

유문장등(留門長燈)하고 자리 보존하고

저 달이 떳다 지도록 기다리소.

 

 

 

진주 촉석루에서 임천가(林泉歌)를 들으니

 

1. 이후로 내성이 불경을 염송(念誦)하며 반드시

'천 선생님'을 찾고야 말겠노라'는 일념으로 전국을 떠돌며 지내더니

 

2. 하루는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에 이르러 설핏 낮잠이 드니라.

 

3. 이 때 홀연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하늘에서 한 선관의 음성이 들리며

 

4. "내선(乃善)아, 네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노라.

노래를 받아라." 하고 낭랑하고 유려한 음률로 임천가(林泉歌)를 들려주는데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선율이더라.

 

5. 이윽고 노래가 그치매 다시 선관이

"석가모니는 지나간 부처니 염불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너는 천 선생을 찾아 모시도록 하라." 하는 말을 남기고

아득히 하늘로 사라지니라.

 

6. 내성이 문득 깨어 보니 꿈인지라 크게 용기를 얻어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틀림없이 천 선생님을 만나겠다.'

생각하고 내처 길을 떠나 오매불망 아버지와 천 선생님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7. 정미년 여름에 이르러 미륵신앙의 본원지인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에 들어가

며칠 동안 머물면서

 

8.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현신출세 미륵불이신 천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시기를

미륵불께 지성으로 발원하니라

 

 

제삼장 임운조화(任運造化) 二十六 - 二十七 병오년(1906년)2월에

상제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서울레

천지개벽경(정영규)

.

二十七​ 정미년(丁未年/1907년)초가을에 모든 종도들이 모여서

술을 대접할세 가라사대 "앉은 순서대로 시조를 부르라"하시니 차례대로 부르더라

 

이때에 시조를 못하는 사람은 막노래도 부르며 순서가 돌아가던바

안내성은 태인 대각교(大覺橋)에서 뵈옵고 시봉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방에

들라는 명이 계시지 않으므로 공사에 참여치 못하고 밖에만 있더니

그날은 안내성을 처음으로 방에 들어 앉히시므로 내성은 황공히 앉았더라 급기야

 

안내성의 차례가 되어 전에 듣고 배워둔 임천가(林泉歌)를 하였더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내성은 촉석루를 언제 다녀왔느뇨"하시니

 

내성은 깜짝놀라 속으로 생각하기를 '진실로 선생께서는 신인이시로다.

내가 왕년에 촉석루에서 이 노래를 배운줄 어찌 알 수 있으리요'하고

탄식 했다하더라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 1556 명종11 ~ 1622 광해14 )선생 일대기

 

해월(海月) 선생은 조선 중기[1556(병진)∼1622(임술),

명종 11∼광해 14]의 문신으로, 휘(諱)가 여일(汝一)이며, 자(字)가 회원(會元),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또한 호가 처음에는 하담(霞潭), 해월(海月), 매월(梅月)이며, 후에는 만귀(晩歸)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사동리(沙銅里) 생가의 연원(淵源)을 말한다면,
황씨(黃氏)의 시조가 되시는 락(洛)이 중국의 강하(江夏)에서

우리 나라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의 월송정 북쪽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다가, 충절공(忠節公) 황서(黃瑞)가 군(郡)의 북쪽에 있는

정명리(正明里)로 이주(移住)하여 살아왔었다.
그런데 해월(海月) 선생의 아버지 되시는 창주공(滄州公)이,

사동리(沙銅里)의 사직(司直)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여식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사동리에 터를 마련하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명종(明宗) 11년(1556: 丙辰年) 10월 21일 병오일 사시에

사동리(沙銅里: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2세 때부터 풍골이 뛰어나,

사람들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비범한 아이라고 하였으며,

5세 때부터 비로소 독서를 시작하였다.
8세 때에는 선생은 사동리 집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정명리(正明里)에

계신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다.
해월(海月) 선생은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외우고 그 이치를 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는 대해(大海) 선생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아버지인 창주공(滄州公)은 '이 아이가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형제들인,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과

그의 형이 되는 군수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선생이 찾아와서,

극찬을 하며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해월(海月) 선생의 집안은 워낙에 가난하여 해월(海月) 선생의 어머니는,

10여 리씩 떨어진 대해(大海) 선생의 집으로 어린 아들이 매일 수업받으러 다니는데,

밥을 해서 먹여 보내지 못하고 조석으로 멀건 죽을 먹여 보내니 매우 가슴 아파하며,

사흘에 하루라도 진하게 쑨 죽이라도 먹여 보냈으면 하며,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1569(선조 2년, 己巳)년 선생 14세 때에, 처음으로 간성시(杆城試) 진사시(進士試)에 진주죽서루(眞珠竹西樓)에 대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그 당시 강릉 부사였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서

관청에 초대하였으며, 그를 칭찬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1572(선조 8, 乙亥)년 5월, 나이 20세 때에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의 여식과

혼인을 하였다.
또한 가을에는 당시의 경상도 감사가, 안동부(安東府)에 와서 백일장을 열었다.
이때 선생은 동상(東床)에 있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어찌하여

시험장에 나가지 않느냐고 하자, 하는 수없이 해월(海月) 선생은 시험장에

입장하였던 것이다.
다른 과거 시험보는 선비들은 붓을 들어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선생은 코를 골며 그 옆에서 잠을 자다, 해가 기울어 시험장이 파할 무렵에서야 앞의

병풍이 쳐 있는 곳으로 나아가, 단번에 붓을 들어 쓰고는 그대로 제출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 글이 바로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에 있는, 치술령부(鵄述嶺賦)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이 향해진사시(鄕解進士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며,

당시 시험관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생각하였고,

그의 이러한 일이 크게 소문이 났었던 것이다.
이때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였으며,

그 때 그가 남긴 치술령부(鵄述嶺賦)는 잘 알려진 소문난 글인 것이다.
1576(선조 9, 丙子)년 2월에 진사복시에서 3등을 하였으며,

7월에는 구담부(龜潭賦)를 썼다. 1577(선조 10, 丁丑)년 비로소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성균관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일대(一代)를 구가(驅駕)하였다고 한다.
1585(선조 18, 乙酉)년 봄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옥계서당(玉溪書堂)을 찾아 배(拜)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16일에 별시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예문관검열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 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1586(선조 19, 丙戌)년 정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동 예안(宣城)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교정과 편집을 보았으며,

10월에는 사가호당(賜暇湖堂)에 들어갔던 것이다.

(선례로 보아 7품 이하의 벼슬로는 처음이라고 함)
1587(선조 20,丁亥)년 9월에 예문관 대교가 되었으며,

1588(선조 21, 戊子)년 정월에 임금이 불러 편전에서 야간강의를 여러 차례 했으며,

이 때에는 선비들이 서로 의심하고 서로가 배반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스러웠는데, 류성룡(柳成龍) 선생도 오랫동안 수습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 때 해월(海月) 선생을 불러서는,

어찌하면 화목하게 분란없이 안정케 할 수가 있을까 하며 해월(海月) 선생의 의견을

듣고서, 류성룡(柳成龍) 선생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4월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는데,

현판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약포(藥圃) 정탁(鄭琢),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 선생 등등 수많은 인사들이 찬양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또한 7월에는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며,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내려갔었다.

1589(선조 22, 己丑)년 8월에 선조 임금이 불러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여러 차례

야간강의를 하였다.
신묘(辛卯)일 이 날은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병사(兵事)에 대하여 논했다.
이 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려는 조짐이 있어,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들였는데,

이 때 정언신(鄭彦信),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을 만나 보았다.
11월에는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는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 중론이 다 왜국에 사신을 보내자는데로 기울어지자,

선생 홀로 불가함을 조목조목 들어서 반대하여 말하기를,
「양국이 국교가 열리어도 난은 일어날 것이며,

열리지 않아도 난은 일어날 것인데,

차라리 국교를 끊고서 난에 대비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抗言曰 通亦發 不通亦發 莫如不通之爲少自取也)」 라고 하였다.
그 때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그를 가리켜,

동해의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시를 지어주며 격려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동해유로연(東海有魯連) 기인역항절(其人亦抗節)
거세욕종진(擧世欲宗秦) 이독대주일(爾獨戴周日)
담소각삼군(談笑却三軍) 기기재촌설(其機在寸舌)
아유일편심(我有一片心) 천추여군설(千秋與君說)

동해(東海: 조선)에도 노중련(魯仲連)이 있는데,
그 사람 또한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는(抗節) 사람이로다.
온세상이 다 진(秦)나라를 (황제의 나라라고) 높이려 하였으며,
그대 홀로(해월 선생) 일본과 친하는 것을 탄식하며(戴周日),
담소(談笑)하며 삼군(三軍: 대군)을 물리치는데,
그 기지가 한치의 혀끝(寸舌)에 있구나.
나 또한 한 조각 붉은 마음 있어,
천추(千秋)에 그대의 뜻(君說)과 함께 하노라.

노중련(魯仲連)은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으로,

기발하고도 웅대한 책략(策略)을 잘 구사하였으나,

고상한 절개를 지닌 분으로 세속을 초탈하여 전혀 벼슬할 뜻이 없는 분이었다.
그가 일찍이 조(趙)나라를 두루 유람할 때,

마침 진(秦)나라 왕은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조나라 군사

약 40만여(萬餘) 명을 전멸시키고, 동쪽으로 추격하여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에워싸니 조(趙)나라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으나, 제후국들은 진(秦)이 두려워 감히

구원군을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위(魏)나라 왕이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조(趙)나라를 구원케 하였으나,

역시 진(秦)나라의 군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탕음(蕩陰: 河南省)에 머물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위(魏) 왕은 객장군(客將軍: 타국 출신의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시켜,

몰래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들어가 조(趙)나라 왕의 숙부인 평원군(平原君)을

통해 조(趙) 왕에게 이렇게 건의하게 했다.
「진(秦)나라는 예전의 제(齊)나라와 세력을 다투어 제왕(帝)을 칭하다가 얼마 뒤에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제(齊)나라는 점점 쇠약해지고 이제는 진(秦)나라만이 우뚝

강대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진(秦)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한 것은

반드시 한단(邯鄲)을 차지하고픈 욕심에서가 아니라 다시 제왕(帝)의 칭호를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니 만약 조(趙)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을 높여 제왕(帝)이라고 칭한다면 진(秦)왕은 기뻐서 철수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 노중련(魯仲連)은 만나기를 꺼려하는 신원연(新垣衍)을 만나 말하기를,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노예처럼 다루는 진(秦) 왕이 만일 제멋대로

제왕(帝)이 되어 그릇된 정치를 천하에 편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습니다. 진(秦)

왕의 백성이 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진(秦) 왕이 제왕(帝)이라 칭하게 되었을 경우 생기는 해로움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를,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주문왕(周文王)이 모두 주(紂)왕의 삼공(三公)이었는데, 구후(九侯)가 미인인 그의 딸을 주(紂)왕에게 바치자

주(紂)왕은 그녀가 못생겼다고 하여 구후(九侯)를 소금에 절여 죽이자, 악후(鄂侯)가

이를 만류하니 그를 또한 포를 떠서 죽이고, 이 소식을 들은 주(周) 문왕(文王)이

탄식을 하자 그를 유리(?里)에 있는 감옥에 100일이나 가두었다가 그를 죽이려한

역사적인 사실등등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하고, 결국에는 신연원(新垣衍) 본인에게도

해가 미치게 될 것임을 말하자, 이에 신원연(新垣衍)은 그제서야 일어나 절하고서

사과하였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장군은 곧 군사를 50여리나 물렸고, 또한 위(魏) 나라의 공자(公子: 信陵君) 무기(無忌)가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명(君命)이라 속이고 위(魏)나라 장수 진비(晉鄙)의 군대를 탈취하여,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므로 진(秦)나라 군대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던 것이다.
이에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봉작(封爵)을 세 번씩이나 주고자 했으나, 노중련(魯仲連)은 끝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주연을 열어 천금(千金)을 바치며 장수(長壽)를 축원하니 노중련(魯仲連)은 웃으며, 「천하의 선비가 귀한 존재로 불리워 지는 것은 남을 위해 우환을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주며 근심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는 까닭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선비도 장사꾼의 그것과 다를바가 없지요」 라며 거절했다.
평원군(平原君)과 작별하고 떠난 후 평생토록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 후 이십 여년이 지나 연(燕)나라의 장군이 제(齊)나라의 요성(聊城: 山東省)을 점령했는데, 요성의 어떤 사람이 연(燕)나라 왕에게 연나라 장군을 참언(讒言)했다. 이에 참소(讒訴)를 당한 연(燕)나라 장수가 주살될 것을 두려워 요성(聊城: 산동성)에서 농성한채 감히 연(燕)나라로 귀국도 못하고 굳게 지키니,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일년 이상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때 노중련(魯仲連)이 화복(禍福)을 논한 긴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燕)나라 장군에게 보냈다.
연(燕)나라 장군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면서 갈등으로 밤낮을 지새다가, 결국 탄식하다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요성(聊城)안은 혼란해졌고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은 마침내 요성(聊城)을 함락시켰다. 전단(田單)은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魯仲連)의 공적을 아뢰니, 제(齊)나라 왕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벼슬을 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노중련(魯仲連)은 바닷가로 몸을 피해 달아나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를 누리는 몸이 되어 남에게 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세상을 가볍게 보고 내마음 내키는대로 살아가리라.」

1590(선조 23, 庚寅)년 5월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다.
선생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하루는 그의 집을 방문하니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무슨 글을 쓰고 있다가 선생을 보고는 그 책을 싸서 감추자,

선생이 정색을 하고 무슨 일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감추어야만 하느냐고 하자, 임공(林公) 역시 해월(海月) 선생이 크게 절조가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그 책 표지의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이었다.
그 때 선생은 그 책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붓을 들어 발문을 써서 주었으며,

그에 대한 발문과 시도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있다.


1590(선조 23, 庚寅)년 10월에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인 병마절도사(兵使) 원(垣)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또한 선생이 손수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범준의 심잠(范浚心箴)을

써주면서 마음을 깊이 경계하기 위하여 큰아들인 중윤(中允)에게 주어 항상 외우게

하였다고 한다.
1591(선조 24, 新卯)년 12월 선조 임금으로부터 예문관 봉교로 다시 부름을 받고,

대학(大學)등 여러 서적을 하사 받았다.
1592(선조 25, 壬辰)년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4월에는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들이 강원도를 지나 함흥에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갑옷을 버리고, 지방 수령들은 북으로 달아나는 상황에서,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있던 해월(海月) 선생이,

함경 감사 류영립(柳永立)에게 '함흥은 많은 군사들이 지키고 둘러싸여 있는 근본이

되는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철령에 있는 군대가 뒤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의지할 수 없게되어 실패하는 경우,

안변이북 함흥까지 군대가 물러나게 된다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병마(兵馬)를 미리 조련하고, 성을 굳게 지켜서,

남쪽 군을 지원하여 적으로 하여금 철령을 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가? '

라는 서신을 보내 권유하였다.
그러나 류영립(柳永立)은 끝끝내 따르지 않았다.

급기야 적이 철령을 넘으니 함경도는 이미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류영립(柳永立)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대신 칠계(漆溪) 윤탁연(尹卓然)이 함경 감사가 되었다.

병풍(屛風) 고개에 있던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도 도망하여 난대(鸞臺)로 들어가고, 토병(土兵)이 난을 일으키니, 적이 이르기도 전에 창고는 어지럽게 흩어지고 텅비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해월(海月) 선생의 말대로 된 연후에야,

류영립(柳永立)은 후회하고 탄복을 했다 한다.

또한 회령부(會嶺府)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진)과 순화군(順和君) 보(보)와 이들을 배행(陪行)한 대신 및

지방 수령 등, 수십인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투항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월(海月) 선생은,

천지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국경인(鞠景仁)의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창의사(倡義士) 이성임(李聖任)과 만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게 되어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기회를 따라 계책을 강구하였다.
회령(會嶺)의 유생(儒生) 신세준(申世俊), 오응태(吳應台), 나정언(羅廷彦),

임순(林恂)으로 하여금 장사들을 규합케 하여,

경성(鏡城)을 지키는 회령사람들을 은밀히 타일러,

명나라 군사들이 왜적들을 다 멸한 다음에 괴수들을 토벌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국경인(鞠景仁), 함연수(咸連守) 등을 일시에 잡아 참살(斬殺)하였다.
또한 함흥토적(咸興土賊) 진대유(陣大猷)와 그의 아들인 계수(桂樹) 부자가 왜적에게

투항해서 백성들을 해치는 행패가 심했다.

이에 대유(大猷)와 친분이 있는 한덕원(韓德遠), 덕구(德久) 형제들을 통하여 글을

보내, 대유(大猷)에게 화복(禍福)을 늘어 놓으며 꾸짖고 타일렀으나 명령을 듣지 않자,

김수준(金秀俊), 최찬(崔贊) 등을 보내 진대유(陣大猷) 부자를 포박하여 넘겼다.
이보다 앞서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이 진대유(陣大猷)의 아들인 계수(桂樹)를

아병(牙兵)으로 삼아서 데리고 다녔다.
해월(海月) 선생이 '이 사람은 불순한 기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까이 두느냐' 고 충고하였으나, 박순남(朴順男)은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결과가 해월(海月) 선생의 말처럼 되자,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선견에 탄복했다 한다.
1593(선조 26, 癸巳)년 정월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부임해 갔으며,

형조정랑이 되었다.
6월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

594(선조 27, 甲午)년에 다시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되었으며,

3월에 명나라 장수(將帥) 천총(千摠) 이영춘(李榮春)과 화전(火戰)의 비방(秘方)을

논하다가, 명나라의 화전(火戰) 사용법이 매우 뛰어나자, 선생이 그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간청하여서 허락받았다.
선생은 화전(火戰) 비법(秘法)을 기록하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보내고,

또한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방어한 일들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문장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고, 병법 또한 뛰어났다.
9월에는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이 선조에게 청하기를,

병영(兵營)에는 한순간에 일이 만 가지로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해월(海月)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주청하여,

불가피하게 권율(權慄)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진주(晋州)에서 권율(權慄) 장군의 병영(兵營)에 있을 때,

후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백의종군 하면서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이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함께 이야기하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수전요해(水戰要害: 지세가 험조(險阻)하여 지키기에 편하고

공격하기 힘든 곳)를 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정왜록(征倭錄)에 실려 있는 것이다.
1596(선조 29, 丙申)년 5월에 선략장군행세자익위사사어(宣略將軍行世子翊衛司司禦)를 제수받았다.

1597(선조 30, 丁酉)년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에 올랐으며,

12월에는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제독(提督) 마귀(麻貴), 그

리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함께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다.
1598(선조 31, 戊戌)년 9월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이 때에 명나라의 사신인 찬획주사(贊획主事)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나라의 안위가 위급함에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을 하였겠는가?
크게 고심한 끝에, 그 당시 문장으로 가장 총망받는 사람을 가려 뽑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에, 정사(正使)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 (우의정)이, 부사(副使)로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 (이조판서)이, 서장관(書狀官)으로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해월(海月) 선생이 뽑히게 되어, 10월 21(癸酉)일에 서울 서소문 모화관(慕華館)을 출발하게 되었다.
11월 10일 아침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으며,

12월 6(丙辰)일 압록강을 건넜다.

1599(선조 32, 己亥)년 1월 23(甲辰)일 비로소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황성(皇城)

동문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 사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25(乙亥)일 병부(兵部)에서 보내온 공문서인 자문(咨文)에는,

우리 나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대책을 마련중에,

뒷일을 해월(海月) 선생이 맡아 수습하여 마침내는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사(上使)였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같이 갔던 사신일행(使臣一行)들과 어려웠던 상황에 대하여 주고 받은 이야기를,

백사(白沙) 선생 문집(文集) 23권에 밝혀 놓았는데,

해월(海月) 선생이 이 일의 맹주(盟主: 동맹의 주재자)라 하였다.
그 당시 해월(海月) 선생은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가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해월(海月) 선생은 우리 나라의 입장을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혼자 명나라의 수많은 조정 관리들과 접촉하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만나서 그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자세히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2권에 기록하여 남겨 두었다.
사실 해월(海月) 선생은 명나라 조정의 여러 관청을 다니면서, 진정서(陳情書)를

전달하고 우리 나라의 무고(誣告)를 진설(陳說)하고, 통변(痛辨)하자,

각로(閣老: 재상)와 고위관리(高位官吏)들은, 그

의 언변과 논술(辭語)이 분명하고 예절바른 태도에 모두들 감탄하고는,

다투어 서로 차와 술을 대접하며 나라의 치욕을 벗겨 줄 테니,

공(公)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의 관상가(觀相家)가 조선(朝鮮)의 사신 일행 중 해월(海月) 선생을 가리키며,

 

『時相者來 使行 指先生 曰黃書狀生於東國 稟得萬里氣像甚可異也. 在座人曰書狀生於東海 世居小國 何以稟得萬里氣也. 相者曰信不誣矣. 稟生東海之氣書狀之量 河海弘量矣 嘖嘖稱歎』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지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라고 하자,

함께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해(東海)에서 태어나

대대로 소국(小國)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상가(相者)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동해(東海)의 기(氣)를 받고 태어난 서장관(書狀官)의 도량(度量)은 하해(河海)와 같은

분입니다.' 라며 크게 탄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에 따른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에 전하는 일화가 있다.

그 당시, 명(明)의 신종(神宗) 황제도 해월(海月) 선생에게

'조선(朝鮮)은 삼천리(三千里) 강토(疆土)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서 명(明)을 치려 하느냐?' 라고 물었다

한다.
만일 여기서 바로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머뭇거린다면 모든 일은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朝鮮)이 일본과 연합하여,

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찾겠다는 오해로 인하여

명(明)의 황제앞에 해명(解明)키 위해 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하였다.
'예 신(臣)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絶妙)하고 적절(適切)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종(神宗) 황제는 무릎을 치면서, '조선(朝鮮)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여일(汝一)」 이라는 이름이 「너 하나밖에 없다」 는 뜻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해결하고 귀국하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동해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馬嶽山) 중턱에다,
거주(居住)하고 있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의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의 조정에서 조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황제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몇 십년 뒤에 화재로 소실(燒失)되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그 잔해가 아직도 간혹 나오고 있다고 후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1599(선조 32, 己亥)년 3월 18(丁酉)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4월 24(癸酉)일 압록강을 건너고,

4월 25(甲戌)일에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윤 4월 기해(己亥)일에 복명(復命)했다.
이 때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어 5월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가을에는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의 감독(監督)직을 맡아 퇴계(退溪) 선생 문집(文集)을 처음 간행하였는데, 물자를 조달하며 이를 도왔다고 한다.
1601(선조 34, 辛丑)년, 선생의 나이 46세의 봄에 울진의 박곡(朴谷)을 얻어

박곡기(朴谷記)를 지었으며, 10월에는 예천군수를 제수받았으며,

12월에 예천 임소에 갔다. 1602(선조 35, 壬寅)년 2월에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으며, 여름에 안동(安東) 박곡(朴谷)을 얻어 정자(亭子)를 지었으며,

후박곡기(後朴谷記)를 지었다.
6월 13일 부인(夫人) 김씨(金氏)가 임소에서 사망하자,

9월 13일 김씨 부인을 수곡(水谷)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604(선조 37, 甲辰)년 봄에 완산이씨(完山李氏) 덕원군(德原君) 도정(都正)

추(樞: 成宗대왕의 4세손)의 여식과 혼인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약포(藥圃) 정간공(鄭簡公), 탁(琢)의 외손녀(外孫女)이다.


1606(선조 39, 丙午)년에 금성현령(金城縣令)을 제수받았다.

또한 어모장군행룡양위부사과겸여고(禦侮將軍行龍驤衛副司果兼如故)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에 명나라 군이 철병을 하기 위하여, 사신(使臣)의 상사(上使)로 한림편수(翰林編修)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로는 급사(給事) 양유년(梁有年)이 천자(天子)의 조칙을 반포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시문(詩文)에 능한 관리를 뽑아서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하였다.
이 때 해월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한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시 또한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기록되어 있다.
9월에는 영천(永川) 군수를 제수받았다. 이 때 영천 지방에서 날뛰던 도적떼들은

해월(海月) 선생이 영천 군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1607(선조 40, 丁未)년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선생의 장자인 중윤(中允)과

더불어 임고서원(臨臯書院)에서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 문집의 교정을 보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타서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본(舊本)과 서로 비교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며 문집(文集)을

완성시키려고 하였으나, 일개 읍(邑)의 힘으로는 일을 끝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 경상감사(慶尙監司)인 유영순(柳永詢)에게 청하여, 경주(慶州)와 더불어서

수개월에 걸쳐 그 문집(文集)을 완집(完集)하게 하였다. 또한 포은(圃隱) 선생의

연보(年譜)에,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 숨겨 두었던 영정을 베껴서 그려 넣었다.
7월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공(功)으로, 선무원종훈이등(宣武原從勳二等)의

녹(錄)을 받았다.
1608(선조 41, 戊申)년 9월 22일에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10월 19일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1612(광해 4, 壬子)년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제수받았다.
1613(광해 5, 癸丑)년 봄 관직을 그만두고 귀가하여서는, 춘추(春秋)를 좋아하여

손수 연의(演義) 책 2권을 썼는데, 책의 이름은 인경연의(麟經演義)이다.
1615(광해 7, 乙卯)년에 동래(東萊)부사를 제수받았다.
당시 동래(東萊)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러 고을이 피폐해져 있었다.
해월(海月) 선생은 먼저 백성의 주거(住居)를 안정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주하는 곳이 안정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체통이 서지 않는다며, 전쟁에 불타 버린 곳을 깨끗이 씻어내고, 지붕을 잇게 하고, 처하는 일마다 태만히

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데 엄숙하고 의지가 굳으니, 왜인들이 삼가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한다.
또한 정치가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학교 세우는 일을 늦출 수 없다 하여,

학문을 하는 선비를 찾아서 사대(使臺)라는 직함을 주어 훈도(訓導)의 소임을 맡기고,

정부(政府)의 재정을 축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일을 시켜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
1618(광해 10, 戊午)년 8월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해월헌(海月軒)을 만귀헌(晩歸軒)이라고 고쳐 불렀다.
9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았다.
1619(광해 11, 己未)년에는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의 행장을 찬(撰)했다.
1620(광해 12, 庚申)년 가을에는 조정의 대신(大臣)들이 경상도 감사(嶺伯)로

추천했으나, 시를 써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1622(광해 14, 壬戌)년 4월 2일 병이 심해지자 부인 이씨에게 이르기를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라'고 이르고는, 자제들을 가르쳐

훈계하기를(敎訓) '집을 잘 돌보는 것이(保護門戶) 내가 깊이 기원하는 바이다(深祝)'

라고 하고는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일(産業)과 죽은 뒤의 일(後事)에 대하여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家席) 편안히 운명하셨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향년 67세였다.
이 때 나라로부터,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이라는 직함을 증직 받았다.


8월 13일 평해군의 서쪽 오태산(五台山)에 간좌지원(艮坐之原)으로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의 위패(位牌)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과 함께 모셔져 제향(祭享)되고 있다.


1774(영조 50년, 甲午)년에 문집(文集) 간행(刊行)을 시작하였고,

1776(영조 52년, 丙申)년 청명절(淸明節),

문집(文集) 7책 14권이 목판(木版)으로 완간(完刊)되었다.
책 서문(序文)을 보면, 영조(英祖) 50년인 1774(甲午)년 봄에 판각(板刻)을 시작하여

영조(英祖) 52년인 1776(丙申)년 봄 청명절(淸明節)에 목판(木版) 인쇄(印刷)를 끝냈다고 나와 있는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 서문(序文)은

이상정(李象靖, 1711(肅宗 37)년∼1781(正祖 5)년) 선생이 쓰셨던 것이다.


이상정(李象靖) 선생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호가 대산(大山),

자는 경문(景文)이며, 1735(英祖 11)년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1739년에는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산(大山) 서당을 짓고,

제자들의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에 연일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에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 경제잠집설(敬齊箴集說) 등 사상적(思想的) 기초를 정립한 저술(著述)을 남겼으며,

또한 사례상변통교(四禮常變通巧),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 그 밖에도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근원(根源)이 되는 이황(李滉) 선생의 사상(思想)을 계승하고

전승하는 입장에서 사상적(思想的) 터전을 마련한 분이다.
그는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고종(高宗) 때 이조판서로 추증이 되었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은 전체가 7책 14권으로 되어 있으며,
1∼4권 까지는, 시(詩)이고, 5권은, 부(賦)와 대책(對策)과 론(論)이며,
6권은, 서(書),
7권은, 소(疏), 장계(狀啓), 교(敎), 전(箋), 표(表), 송(頌), 기(記), 서(序), 발(跋),
8권은, 잡저(雜著), 제문(祭文),
9권은, 은사시(銀槎詩),
10∼12권은, 은사일록(銀槎日錄),
13권은, 전(傳), 묘지(墓誌), 행장(行狀),
14권은,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 문집(文集)의 발문(跋文)을 쓴 이세택(李世澤,

1716(肅宗 42)년∼1777(正祖 1)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이며 예안 출신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8대손이다.
1753(英祖 29)년에 정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나,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三司) 모두가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과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停啓)에 응할 것을 권(勸)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성격 또한 대쪽같이 곧은 품성(品性)을 지닌 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또한 찬집당상이 되었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신 분은 이유원(李裕元) 선생인데,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후손인 것이다.
이유원(李裕元, 1814(純祖 14)년∼1888(高宗 25)년)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이다.
1841(憲宗 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를 거쳐, 의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고종(高宗) 초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의 반목으로 1865(高宗 2)년 수원 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 해 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고,

1873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각(失脚)하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서임되었다.
또한 학문(學問)에 능하여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오고략(嘉梧藁略), 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도 능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국가에 큰 공(大功)을 세우고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인자(一人者)로 일컬어졌던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그 이유를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士之能享大名顯當世者 莫不有先達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前焉.
士之能垂休光照後世者 亦莫不有後進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後焉莫爲之前
雖美而不彰 莫爲之後 雖盛而不傳』

선비(士)로서 명성을 올려 그 시대에 유명하게 되는 자는,
그 사람보다 선배(先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갖고 있는 자가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는 일은 없고,
또 선비(士)로서 뛰어난 공적을 남겨 후세까지 명성을 나타내는 자는,
그 사람의 후배로서 천하의 인망(人望)을 얻고 있는 자가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는 자가 없다.
앞서서 추천하지 않으면 후배는 아무리 아름다운 재주와 덕을 지니고 있어도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고,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으면 선배의 사업이 아무리 성대(盛大)해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不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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