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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대신 사위에게 물려줬던 명당…평해 황씨 세거지로 대물림 .....

★ 해월유록 앨범

by 雪中梅 2020. 7. 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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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대신 사위에게 물려줬던 명당…평해 황씨 세거지로 대물림 .....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해월헌(海月軒)은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해월 황여일(1556~1622)선생의 정침 옆에 지은

별채다.
건물구조는 뒤편의 야산을 등지고 안채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방앗간채, 동쪽에는 정자와 사당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마당을 사이로 대문채가 자리 잡고 있다. 김정목 기자 tigerjm@idaegu.com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6.5칸 규모의 ‘□’자형이며 홑처마 맞배기와집이다.
전면 양측으로 1칸씩 돌출되어 양날개집 형상을 하고 있다.
안채의 동쪽에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해월헌(海月軒)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경사진 대지에 자리 잡은 관계로 전면주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웠으며 앞면 퇴칸은 누마루를 이루었다.

 

 

등 뒤로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동해를 업고 왼쪽으로 사동항, 오른쪽으로 마악산을 좌청룡우백호로 거느리고 있다.
남쪽으로 멀리 동해안 7번 국도가 내달리고 있다.
해월헌 뒤 산등성이에 올라 동해를 굽어보면 1천평 너른 집터가 울진대게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고 낮은 산이 양쪽 집게발로 집을 보호하고 있다.

쭉쭉 뻗은 금강송과 대나무숲이 집터를 감싸고 있는 집터는 안채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옛날 선조들이 드나들었다는 도지고개와 옛날 해월헌 터가 확장된 7번 국도와 함께 눈에 들어온다.
과연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라고 풍수가들이 탐내는 명당이다.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자리잡은 해월헌이다.
궁벽했을 바닷가 마을에 이런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가문이 있었음에 놀란다.

집주인 황의석씨(79)는 “언제 지었다는 기록도 없고 집을 뜯어보지 않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안채 지붕 기와에는 와송이 자라고 있는, 한눈에 고가임을 알 수 있는데 해월헌은 사당과 정침채가 문화재자료에서 2012년 경북도지정 민속문화재 156호로 지정됐다.

조선 중기 당파싸움의 한복판에서 서인 정철과 기 싸움을 벌이던 동인의 우두머리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임진년 왜적이 쳐들어오자 거듭된 탄핵으로 당시 강원도 평해로 귀양온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로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는 아계는 강릉에서 동해와 삼척을 거쳐 울진으로 내려오면서 산세를 유심히 살펴본다.
태백산 끝자락 어딘가에 정기가 맺힌 길지가 있을 것이라며 찾아낸 명당이 바로 해월헌 자리다.
강릉 이남에서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전한다.

◆딸이 물려받아야 후손이 잘 된다

해월헌은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해월 황여일(1556~1622)의 정침 옆에 지은 별채다.
처음엔 인근 마악산 꼭대기에 지었던 건물로 나중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500여년 전 조선 세종 때 영월군수를 지낸 권조가 처음 이 고을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다.
권조는 사위 이명유에게 집을 물려준다.

“이 집은 자네에게 물려주마. 이 집터는 사위에게 물려주어야 영원히 이름난 집터로서 그 가치가 유지된다는구나.” 홍천 군수로 있던 이명유가 을사사화에 몰리어 벼슬에서 물러나자 권조는 사위에게 집을 물려준 것이다.

이명유는 다시 사위 정창국에게 집을 물려준다.
정창국은 사위인 판결사 창주 황응징에게 물려준다.
황응징은 딸이 없어 해월 황여일에게 이 집을 물려준다.
그때부터 황씨가 집을 물려받게 된다.

안동 권씨가 전의 이씨에게 넘겨줬고 다시 야성 정씨를 거쳐 평해 황씨로 이어온 뒤 지금까지 집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아들이 있어도 사위에게 물려주었던 집터는 황씨 가문에 와서 주인 자리를 굳혔으니 사위에게 물려준 것은 제대로 주인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모양이다.
풍수가와 명리가들은 이곳 지맥과 해월이 태어난 해의 사주를 놓고 외손봉사터였던 해월헌을 황씨 가문이 이어받은 유래를 풀이한다.

해월헌을 관리하고 있는 해월의 13세손 황의석씨(79)는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49)이 ‘정년퇴직할 때까지는 아버지가 맡아 달라’고 말하고 있다”며 황씨의 종택 관리가 대를 이을 것이라고 공언한다.


◆ 해월(海月)의 총기와 능력 발휘한 명 신종 문답 장면

선조 32년 사헌부 장령인 해월은 서장관으로 명나라 북경에 간다.
해월이 명나라에 간 것은 명나라 사신인 찬획주사 정응태의 무고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정응태는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고 고변한 것이었다.
임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조선으로서는 명으로부터 오해를 사서 또다시 전란을 겪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에서는 변무진주사를 보내 해명키로 하고 백사 이항복을 정사로,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하고 해월을 서장관으로 뽑아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보낸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유명한 관상가가 조선의 사신 일행 중 해월에게 “서장관은 동국에서 태어났지만 만 리 기상을 타고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황 서장관은 동해에서 태어나 소국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 리 기상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그러자 관상가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서장관의 도량은 하해와 같은 분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탄복했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소문을 들은 신종이 해월에게 물었다.
조선은 기껏 삼천리 강토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를 타고나서 명나라를 치려 하느냐?” 조선 사신 일행은 등에 땀이 흘렀다.
그런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일부러 왔는데, 여기서 잘못 대답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한 방에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이미 두 차례나 변무사를 파견했지만 중국의 오해를 풀지 못해 자신들이 세 번째 변무사로 파견된 것이다.

해월은 황제 앞에서 거침없이 대답한다.
“예, 저희 집 앞에는 만리창해가 있습니다.
”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고 그래서 중국 땅은 넘보지 않았다는 해월의 절묘한 대답에 신종은 무릎을 친다.
“조선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신종은 ‘너 하나밖에 없다’는 뜻의 ‘여일’이라는 이름이 공연히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고 칭찬했다.

내 자리 뒤에 병풍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 아느냐?” 문답이 끝난 뒤 물러나는 해월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용상에서 일어나 따라 나오던 신종은 느닷없는 질문을 계속한다.
해월이 즉시 병풍에 쓰여 졌던 글을 암송하자 신종은 “왜 10폭 밖에 못 읽었느냐”고 묻는다.
해월이 12폭 중 2폭은 접혀 있어서 못 읽었다고 대답하자 신종이 내관을 시켜 확인해보니 과연 2폭은 접혀 글을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명 신종과의 대화는 변무사 일행이 중국에 머무는 7개월 동안 중국 관리들을 만나 조선의 실태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여러 사건들 중 백미로 꼽힌다.
서장관이었던 해월이 정사와 부사를 젖히고 신종의 문답 상대로 지목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사흘동안 이어진 필담과 구두 문답은 해월의 능력과 문장을 보여주는 쾌거였다.
해월과 동년 동월생으로 해월과 각별했던 백사 이항복은 “신종의 오해를 푼 것은 해월의 공이었다”고 백사문집에 남겼다.

해월은 귀국한 뒤 즉시 동해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에 거주하는 집과 같은 집을 지었다.
정남향인 해월의 집에서는 동해가 바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서 황제를 농락했다며 트집을 잡을 것을 염려해서 방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안타깝게도 수십 년 뒤 불이 나 수많은 서책들과 함께 타버리고 지금은 밭이 되어 지금도 이따금씩 기와조각이 나와 옛 사실을 이야기해준다고 한다.


해월헌(海月軒)이 기른 인물들

 

 

 

 

 

 

 

해월헌에는 (위에서부터)아계 이산해, 필운 이항복, 오창 박동량 등 해월과 교유한 많은 선인들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해월은 부친인 창주 황응징과 숙부 대해 황응청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특히 대해는 임란의 영웅인 정담 장군을 가르친 스승으로 영의정 이산해가 귀양와서 절친하게 교유한 학자다.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 들어 학문을 연마한 해월은 학봉의 중형인 귀봉 김수일의 딸을 아내로 맞는다.
해월은 1576년(선조 9) 진사, 1585년 개종계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겸 춘추관 기사관이 된다.
경상도어사와 사헌부감찰을 거쳐 임란때는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도 큰 공을 세운다.

정담은 정창국의 아들로 선조 8년인 1575년 알성무과에 장원급제하여 김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정담은 전주 길목인 곰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선조는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했다.

글 잘하는 황여일. 조정이 인정한 학자. 그러나 때가 아니면 물러날 줄 알았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리지 않았고 바닷가 갈매기처럼 살려고 했다.

관직으로 나서면서 “만 리 푸른 바다 흰 갈매기가 우연히 인간의 세계로 잘못 떨어지네”라고 노래했다.
신선이 인간 세계에 잘못 떨어진 고고한 갈매기라고 했다.
그런 깨끗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진 해월은 만년에 호를 만귀(晩歸)라 바꾸고 좋은 경관을 찾아 여생을 보낸다.
벼슬길에 나갈 때 노래처럼 순리를 따라 벼슬할 수 있을 때면 나아가고 아니면 물러났다.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져 선비들에게까지 화가 미쳤지만 그는 미리 물러나 화를 모면했다.
그의 문집 해월집에는 “마음은 얼음처럼 차고 투명하여 구름을 헤치고 만리 창공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해월에겐 8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이인 동명 황중윤(1577~1648)은 병조좌랑과 승지를 역임하는 등 해월과 함께 황씨 문중을 빛낸 인물이다.
그러나 조정의 당쟁에 휩쓸릴 것을 염려한 아버지 해월과 달리 정사에 깊숙이 개입한다.
광해군 당시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할 때 청의 편을 드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된 뒤 광해군을 편들어 오랑캐와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받아 11년 동안 전라도 해남에 유배된다.
57세의 동명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기성면 방률리에 수월당을 짓고 세월을 보냈다.

해월헌에는 아계 이산해, 지붕 이수광, 약포 정탁, 식암 황섬섬, 오창 박동량, 월사 이정구, 필운 이항복, 오산 차천로, 상촌 신흠 등 해월과 교유한 많은 선인들의 현판이 걸려 있다.
문신이자 명필로 알려진 아계 이산해가 쓴 해월헌 편액을 비롯, 해월이 서울로 나들이하면서 말안장에 달고 다니던 술잔 담은 술통 등 일부 유물들은 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정말 많은 서책과 문서 수천권은 대부분 화재와 전란 때 소실되고 그나마 남은 유물들은 도둑맞았다고 황의석씨는 안타까워한다.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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