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경원(景元), 또는 경초(景初), 복초(複初) 등이며, 본관은 영양(英陽)으로 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역학(易學), 풍수(風水), 천문(天文), 복서(卜筮), 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하였으며 사직 참봉(社稷參奉)과 천문학(天文學) 교수(敎授)를 지냈다.
어릴 때부터 뜻 세움이 견고하여 깊이 연구(硏究)하기를 좋아하였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항상 독서를 좋아해서 소학(小學) 한 질은 언제나 손에 갖고 있었다 한다.
또한 산수(山水)의 승경(勝景)을 찾아 자연에 심취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즐기면서 두주(斗酒)를 불사(不辭)하였으며, 세속에 잡다한 영욕(榮辱)에 초연(超然)하여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거적으로 문을 달고 살면서도 항상 의연자적(依然自適) 하였다 한다.
역수(易數)에 더욱 정밀하여 음양변화(陰陽變化)를 추산하는 술(術)이 신통(神通)함은 물론이고,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와 복서(卜筮)에까지도 그 요체를 깊이 터득하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땅에서 보이는 증상을 신(神)처럼 꿰뚫어 보았으며, 현기(玄機)와 묘용(妙用)의 기변(奇變)에도 극치(極致)에 달하여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강절(康節)이라 칭하였다.
당대 주역(周易)의 대가(大家)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선생이 격암(格菴) 선생의 명성을 일찍부터 들어온 터라, 강릉(江陵) 부사로 부임해서 격암(格菴) 선생을 초청하여 역리(易理)를 토론하였는데, 천(天)과 인(人)의 관계와 귀(鬼)와 신(神)의 정상(情狀) 등에 있어서 양사언(楊士彦) 선생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듣지도 못한 논설(論說)을 듣고 나서는 깜짝 놀라 절을 하고 하는 말이, 내가 지금에 와서야 비로서 선생을 신인(神人)인 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상대하기를 극히 존경(尊敬)하였고, 편지로 안부를 물을 때면 혹 사씨(師氏)라고도 쓰고 혹 자동(紫銅) 선생이라고 썼을 정도로 그 예우(禮遇)함이 극진하였다고 한다.
격암(格菴) 선생은 여러 번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끝내 과거(科擧)에는 등과하지 못하였고 명종(明宗) 말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사직참봉(社稷參奉)을 제수받아 잠시 서울에 있다가 사은(謝恩)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만년(晩年)에는 더욱 역상(易像)에 유의(留意)하여 이기(二氣)가 유행하는 도(圖)를 작성하여 걸어두고, 음양(陰陽)의 소장(消長)하는 자연법칙을 사고하면서 지내는 것으로 만년(晩年)을 보내려 하였으나, 선조(宣祖) 초에 천문학(天文學) 교수(敎授)로 특별히 부름을 받아 봉직(奉職)하다가 병으로 63세에 세상을 마쳤다.
사후(死後) 서울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와서 조문(弔問)을 하였는데, 서로 힘을 모아 혹자는 관을 준비하여 염습(殮襲)을 담당하였고, 혹자는 역부(役夫)를 데려와 울진까지 운구도 하고 장례일까지도 도와주고 갔다고 한다.
사직참봉(社稷參奉)에 재직시 승려 보우(普雨)의 몰락, 문정(文定)왕후가 죽어 태릉(太陵)에 장사지낼 것, 덕흥군(德興君, 宣祖)이 임금이 될 것, 동서(東西) 분당의 화(禍), 임진왜란(壬辰倭亂), 순회(順懷)세자의 죽음, 명(明)나라 융경(隆慶) 황제의 책립,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죽음 등을 정확히 예언(豫言)했다고 한다.
천문학(天文學) 교수(敎授)로 재직시 태사성(太師星)이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관상감정(觀象監正)인 이번신(李蕃臣)이 나이가 많은지라 자신의 명(命)이 다했다고 말하니, 공(公)이 웃으면서 해당(該當)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했는데, 며칠 후 공(公)이 과연 병으로 작고하게 됨을 보고, 격암(格菴) 선생이 태사성(太史星)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공(公)에 대한 일화(逸話)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지만 몇 가지만 더 소개해보겠다.
격암(格菴) 선생이 아주 소시(少時)에 평해(平海)에 사는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해월 선생의 仲父)선생과 어디로 가게 되어 격암(格菴) 선생이 앞서고 대해(大海) 선생이 뒤에 따라 가고 있었는데, 길에 붉은 천으로 만든 패도(佩刀)가 매달린 채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도 선생은 못 본 척하면서 지나갔었다.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성인(聖人)도 하기 어려운 의연한 행동에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만휴(萬休) 임유후(林有後)의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遺傳)]
격암(格菴) 선생이 어릴 적에 책을 끼고 불영사(佛影寺)에 가다가 마침 바랑을 짊어지고 길가에 서 있는 탁발승을 만났는데, 선생에게 하는 말이 ‘빈도가 짊어진 것이 무거워 걸어가기 어려우니 짐을 갖다 주기를 부탁한다’ 고 하니 선생이 흔쾌히 응락하고 같이 절까지 가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탁발승과 함께 부용성(芙蓉城)에서 노는데, 그 탁발승의 말이 장기를 둘 줄 안다면 내기 장기를 두자고 하여 선생이 승낙하고 소나무 밑에서 장기를 두었는데, 반쯤 두었을 무렵 갑자기 큰 기합소리와 함께 어디로 갔는지 탁발승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려니 땅으로부터 코끝이 뾰족이 나오더니 점차 전신(全身)이 나타나서는 선생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상황에서도 선생은 웃으면서 무엇이 두려우냐고 대답하니 탁발승이 말하기를 바랑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수없이 사람들에게 부탁하였지만, 늘상 욕이나 얻어먹고 매질이나 당하였는데 그대는 아무 말없이 부탁을 들어 주었고,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시험해 보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였는데, 그대만은 두려워하지 않으니 가히 가르칠 만하다 하고 비술(秘術)을 전수하면서 다시 부탁하기를 ‘너는 참으로 보통 사람이 아닌 자라. 도(道)를 배워 행동을 조심하면 충분히 깊고 높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옷을 털고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격암(格菴) 선생이 이로부터 현묘(玄妙)한 조화(造化)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게 되고, 언사(言辭)가 모두 신기하리만큼 영험(靈驗)하였다 한다.
하루는 영동(嶺東)을 지나다가 홀연히 하늘을 쳐다보고 깜짝 놀라면서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근심스러운 말로, 지금 이 시간에 조선을 잔해(殘害)할 놈이 태어났다고 하더니, 뒤에 들어보니 일본에 풍신수길이 그 날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일찍이 강릉(江陵)에 갔다가 한송정(寒松亭)이 불에 탄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탄식하기를, 지금부터 30년 동안에는 강릉에서 과거에 오라는 선비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남사고(南師古)의 예언(豫言)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읍중(邑中) 유사(儒士) 최운부(崔雲溥가) 과거에 급제한 뒤 양친을 위하여 경연(慶宴)을 장차 열려고 하자 격암(格菴) 선생이 읍인(邑人)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모름지기 잔치에 가 보시오. 이 후로는 이 읍(邑)에서는 30년 동안 이와 같은 경사는 다시 없을 것이오.’ 후에 이오(李璈)가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 일이 있은지 바로 31년 후였다.
선생이 여러 번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끝내 과거(科擧)에는 실패하자 어떤 사람이 농담삼아 말하길 선생은 남의 운명(運命)을 헤아리는 것은 능하면서 어찌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는가 하였더니, 웃으면서 대답하길 사적(私的)인 일에는 욕심(慾心)이 개입하기 때문에 추산(推算)하는 술(術)도 분명히 판단하지 못하는 법이라 하였다.
어느 날 과거 보려고 길을 떠나면서
‘진정 괴롭구나. 이렇게 이(利)한 것 같기도 하고, 불리(不利)한 것 같기도 한 이번 길을 가야만 하다니’ 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문인 남세영(南世榮)이 ‘선생님이 역리(易理)에 밝으신 터에 이(利)하면 가시고 불리(不利)하면 안가시면 되는 일을 가지고 어찌하여 이렇게 탄식하십니까?’ 하고 위로하였더니,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운명을 점쳐보니 글귀 중에 「부디 공명일랑 짓지 마라. 또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놀라게 할 사람이 될 것이다(不作功名客亦作警天動地人)」 하였으니, 우리가 오늘에 살면서 입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과거를 통하는 길 뿐인데,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도저히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업을 이룰 수 없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룰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고 혹시 이룰 수 있지 않겠나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밀암(密菴) 이재(李栽)의 남격암유적(南格菴遺跡), 만휴(萬休) 임유후(林有後)의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遺傳)]
세상에 전하기를 선생이 소시(少時)에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 신이한 스님(또는 神人)을 만나 석실로 인도되어 도서 세 편을 전수받았다 한다.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남격암유적(南格菴遺蹟), 만휴(萬休) 임유후(林有後)의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遺傳)]
또한 신인(神人)으로부터 진결(眞訣)을 얻어서 비술(秘術)에 능통하였다고 전한다. [이수광(李수光)의 지봉유설(芝峯類設)]
저서로는 임광기(林廣記), 동상유초(東床遺草), 완역도(玩易圖), 천자주(千字註)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병화(兵火)로 불타버렸고, 묘지명(墓誌銘) 한 편과 과거에 응시할 때 쓴 사륙부(事六賦)인 해옥첨주부 (海屋添籌賦))등이 남아 있으며, 세간에 전(傳)하는 비결서(秘訣書)로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이 단연 으뜸인데, 마상록(馬上錄)과 홍세지(록)(紅細志(錄))는 지금까지 숨겨져 전해 오다가 근래에 밝혀진 진결인 것이다.
공(公)에 대한 일화나 학문의 깊이에 대한 평가는, 이재(李栽)의 남격암유적(南格菴遺蹟), 만휴(萬休) 임유후(林有後)의 남격암유전(南格菴遺傳)을 비롯하여,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設),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등의 명사(名士)들의 저서(著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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