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은 1594년 9월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고, 1595년 4월 진주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8년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은 명나라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정사 이항복, 부사 이정구, 서장관 황여일)로 갔을 때 마테오리치의 감수를 받아 손수 제작한 세계지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2 -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金良善)의 논고에 따르면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선조 때 크게 등용됐던 황여일(黃汝一)의 아들 황중윤(黃中允)이 1604년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손에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 집안에서는 명나라 조정의 하사품이었다고 하나 황중윤의 연행록(燕行錄)에는 북경에서 구득한 것이라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뜻밖에도 이 지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6년대 이르러서다.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평해 황씨 종가에서 300여 년간 비장돼 오던 이 지도를 황씨 집안의 종손인 황병인(黃炳仁)이 밝혀냈는데,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그는 방학을 맞아 집에 와있던 중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물건을 열어보니 ‘兩儀玄覽圖(양의현람도)’라 표제가 붙은 세계지도였다고 한다.
이 지도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까지 들고 간 그는 스승이자 동서문화교류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교수에게 고증을 부탁했다. 이에 교수는 고지도 연구가인 아유자와 신타로(鮎澤信太郞)를 소개했고, 1936년 아유자와가 이 지도를 소개하는 글을 학계에 발표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광복 직후 양의현람도는 황병인의 호의로 김양선 목사가 운영하는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하게 됐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 목사는 이 지도를 박물관 뜰에 파묻고 피란길에 올랐다.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되어 돌아 와보니 박물관 소장품은 대부분 소실돼 없어졌으나 땅속에 묻어 뒀던 양의현람도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 고고학자 김양선이 지켜낸 세계 유일본 양의현람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양선은 이 지도를 땅에 파묻고 피난길에 나서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01302
[최선웅의 지도이야기 67]
천하 유일본 양의현람도를 지켜낸 김양선
매산 김양선(梅山 金良善)은 목사로서, 교육자로서, 고고학자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다는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를 찾아 지켜냈으며, 우리나라 고지도 연구의 토대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고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매산은 1907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부친 김관근 목사가 세운 의주 중원학교를 거쳐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4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시절 인문학과 어문학,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대학문을 섭렵했는데 그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스승인 양주동 교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위해 기독교 관계 자료를 모으다가 산실되어 가는 민족문화유산이 안타까워 수집하게 되었고 그 자료로 민족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돈을 주고도 입수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자 그는 기독교박물관을 설립하겠다는 전제로 자료를 수집했다. 이렇듯 민족유산을 모아 연구함에 고고학 논문이 나왔고, 근세 민족중흥의 길잡이가 된 실학사상을 연구하며 다섯 편의 논문을 남겼다.
전 세계 유일본인 희귀 자료
매산의 학문적 성과는 그가 타계한 지 2년 뒤인 1972년 매산국학산고(梅山國學散稿)란 논문집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고고학 관련 논문 4편, 실학관련 논문 5편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지도와 관련된 논문이 3편이나 된다. 그것은 <明末淸初耶蘇會宣敎師들이 製作한 世界地圖(명말청초야소회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와 <朝鮮古地圖抄-世界地圖(조선고지도초-세계지도)>, <朝鮮古地圖抄-韓國地圖(조선고지도초-한국지도)>다. 특히 매산이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1년에 발표한 <한국고지도연구초>는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우리나라 고지도에 대한 논고로 고지도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 세계 유일본으로 알려진 양의현람도는 매산의 혜안과 의지가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양의현람도는 중국 명나라 때인 1603년 북경에서 이응시(李應試)가 판각한 세계지도다. 이 지도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리마두)가 제작하고 이지조(李之藻)가 판각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참조하여 판각한 것으로 6폭인 곤여만국전도보다 큰 8폭짜리 초대형 지도다.
▲ 양의현람도의 ‘양의(兩儀)’란 천구의와 지구의를 빌려 천지를 의미하며, ‘현람(玄覽)’이란 마음속의 만물을 안다는 도교의 용어이다. 이 지도의 네 모서리에 지구도와 이중천도(二重天圖), 십일중천도(十一重天圖) 등 천문도가 그려져 있어 양의라 한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기록에 의해 곤여만국전도 1판, 2판에 이어 제3판으로 양의현람도가 간행된 것을 알게 된 최초의 사람은 영국의 작가이며 <마테오 리치의 중국지도>의 저자인 바들리(John F. Baddeley)였다. 1917년 그의 논문에 의해 양의현람도의 존재가 알려지긴 했으나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고, 중국에서 그 지도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매산의 논고에 의하면 이 지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선조 때 크게 등용되었던 황여일(黃汝一)의 아들인 동명(東溟은 황여일의 자 黃中允의 호)이 1604년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얻어온 것이다. 황씨 집안에서는 명나라 조정의 하사품이었다고 하나 황동명의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이 지도는 북경에서 입수했다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지도가 1936년경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다. 강원도 평해 황씨 종가에서 300여 년간 비장되어 오던 것을 황씨 집안의 종손인 황병인(黃炳仁)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상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건드리면 큰 병이 난다는 부모의 말에 감히 그것을 열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가 방학을 맞아 귀국하면서 그 물건이 궁금하여 열어 봤더니 ‘兩儀玄覽圖(양의현람도)’라고 표제한 세계지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 지도를 일본으로 들고 가 그의 스승이자 동서문화교류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그 뒤 이시다 교수의 소개장을 갖고 고지도 연구가인 아유자와 신타로(鮎澤信太郞)를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일본학자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가 사진촬영을 했다고 한다. 중국 저장(折江)대학 양위레이(楊雨 ) 교수의 논문 <한국 所藏 마테오리치의 세계지도 연구>에 따르면 1936년 아유자와가 처음으로 이 지도를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고, 1941년 <일본문화에서의 利瑪竇(리마두)의 세계지도>, 1953년 <利瑪竇(리마두) 세계지도의 역사연구>, 1957년 <지리학사연구> 등 연이은 논저를 통하여 이 지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25 때 박물관 앞뜰에 파묻어 보전
광복 직후 이 지도는 우여곡절 끝에 황병인씨의 호의로 매산이 경영하는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매산은 이 지도와 안중근 의사 옥중 유필만을 챙긴 채 피란을 떠났으나 격심한 폭격으로 위험을 느끼자 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지도를 박물관 뜰에 파묻고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되어 돌아와 보니 박물관 소장품은 대부분 소실되어 없어졌으나 땅속에 묻어두었던 양의전람도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다던 양의현람도가 중국 선양(瀋陽)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에 한 본이 보존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이 지도는 1981년 랴오닝성박물관학술논문집에 <利瑪竇和他的兩儀玄覽圖簡錄(리마두화타적양의현람도간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왕선후(王綿厚)에 의해 중국 학계에 알려졌는데, 1994년 발간된 <中國古代地圖集(중국고대지도집)>에는 랴오닝성박물관 본이 세계 유일본이라고 적고 있다.
양위레이 교수의 논지에 의하면 숭실대본은 8폭으로서 세로 길이 199cm, 가로 길이 444cm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나, 랴오닝성 본은 1949년 선양 고궁상봉각(瀋陽故宮翔鳳閣)의 병풍에서 떼어낸 뒤 다시 표구하여 괘도로 제작한 것으로 폭마다 상하좌우로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으며 남아 있는 부분도 글자나 지도의 내용이 희미하여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일본 신도(神道)에 대한 반감이 컸던 매산은 광복이 되자 1948년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 자리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세웠다. 그러나 이 박물관이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자 1958년 박물관을 폐관하고 소장품을 사저로 옮겼다. 이후 숭실대가 매산의 유물을 기증받아 1967년 부설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매산은 “이 일을 위해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전시된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하신 것뿐이지요”라고 말했다.
/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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