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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장자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의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

★ 해월유록 앨범

by 雪中梅 2020. 7. 14.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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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장자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의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이 과거를 본 후 귀향하는 길에 충주 탄금대(彈琴臺) 아래 비를 피해 있는

동안 꿈을 꾸고 지은 한문소설. 탄금대 패전의 근원적 원인을 제도적 잘못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은

 

임진왜란 당시에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탄금대(彈琴臺) 전투의 패배를 재조명한 몽유록(夢遊錄, 꿈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 작품) 작품이다.

역자들은 황중윤의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계선(尹繼善, 1577~1604)의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데, 동일한 소재를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황중윤의 한문 소설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이 소설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으로 알려진다.

황중윤은 이 소설에서 유생(儒生)의 수궁(水宮) 연회(宴會) 참석이라는 모티프를 기반으로 하여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물에 투신한 신립을 몽유자(夢遊者)가 만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꿈속에서 과연 전투 패배의 책임이 신립 개인에게만 있는 것인지를 따져보는 기회로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꿈속에서의 대화를 통해 황중윤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사이에 정작 짚고 넘어갔어야 할 사회적 모순, 제도적 모순과 병폐를 너무도 쉽게 간과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결국 신립의 패배만 기억 속에 남은 채 그러한 패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문제들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황중윤은 소설을 통해 지적하면서, 전란을 야기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한편, 역자들은『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은 발견될 당시부터 소설을 시작하는 부분이 빠져서 떨어져 나가고 없어 주인공이 꿈속에 들어가는 과정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황중윤의 한문 소설에 대해 역자들은 “황중윤의 작품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허구적 서사의 여러 가능성과 결합시킨 결정체”라며,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와 구별되는 가상의 역사 서술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 나타나는 허구는 사대부 문인들의 지적 수준과 교양, 문예 취향에 기반을 둔 수많은 전고((典故, 전례(典例)와 고사(故事))와 문학적인 관습들로 쌓아올린 세계라는 점에서 소설속의 허구와 차이가 난다”면서, “이로 인해 문재(文才)를 과시하는 희필(戱筆, 장난삼아 지은 시문이나 서화)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기도 하지만, 허구 축조 방식에서 나타나는 이런 특이성이야말로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고 평하고 있다.

 



■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황중윤은 1577년(선조 10년)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과 어머니 의성(義城)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평해(平海), 자(字)는 도광(道光), 호(號)는 동명(東溟)이다.

20세에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의 차녀와 혼인하면서 장인인 박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24세에는 부친 황여일(黃汝一)의 명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0~1620)를 찾아가서 몇 달 동안 머무르면서 학문을 배웠다.

황중윤이 지은 「천군기서(天君紀敍)」에 특별하게 언급되는 스승들이 바로 대암 박성과 한강 정구 두 사람이다.

황중윤은 생원으로 1612년(광해군 4년) 36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39세 때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어「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정언·헌납·낭청·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특히 40세 때에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제수됐으나 인목대비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서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616년 신경희(申景禧, 1561~1615)의 옥사에 연루가 되어 추고를 당했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됐다. 이 해에 명나라에서 요동 순마를 위해 병마 7천을 요청해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어서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遞職, 벼슬을 갈아냄)됐고, 다음해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에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했다.

1620년 44세 때에 주문사(奏聞使,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로 임명되어 표문(表文, 예전 외교 문서의 한 종류)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1623년(인조 1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했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주화론자(主和論者)로 몰리면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해남(海南)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해남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와 교유했고, 윤선도의 사촌 동생들인 윤선진(尹善進)과 윤선일(尹善一)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던 일)되었고, 1633년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황중윤은 울진에 돌아온 후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월야동(月夜洞)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도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1648년에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중윤의 묘소는 기성면(箕城面) 삼산리(三山里) 일명 승지봉산(承旨峰山)에 자리하고 있다.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묘지의 문인석(文人石)(좌)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묘지의 비석(碑石)(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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