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壬寅年)에 천사(天師)께서 하운동(夏雲洞)에 게실 새 매양 출타(出他)하실 때에는 글을 써서 신명(神明)에게 치도령(治道令)을 내리시다. 원래(元來) 하운동(夏雲洞)은 산중(山中)임으로 길이 매우 좁고 험하며 수목(樹木)이 우거져 길에 얽혀 잇는데, 치도령(治道令)을 내리시면 여름에는 바람이 불어 초로(草露)를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차게 하야 이녕(泥濘)한 길을 얼어 굳게 하니라.
계묘 정월(癸卯 正月)에 전주부(全州府)에 이르사 서원규 약국(徐元奎 藥局)에 머무시니 김병욱(金秉旭) 장흥해(張興海) 김윤찬(金允贊)이 와 쫓으니라. 이 해에는 전주(全州)와 하운동 간(夏雲洞間)으로 내왕(來往) 하시면서 여러 사람의 병(病)을 의치(醫治) 하시되 약재(藥材)를 쓰지 않고 곳 쾌차(快差)케 하시니 모든 사람이 그 신묘(神妙)하심을 경복(敬服)하니라. 천사(天師)께서 날마다 양지(洋紙) 이삼매(二三枚)에 글과 물형(物形)을 써서 불사르시는데 그 무엇임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라. 제자(弟子)가 물으니 천사(天師) 가라사대 이것은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신명(神明)을 나(喇)하는 부호(符號)이니라 하시다.
계묘 삼월(癸卯 三月)에 천사(天師)께서 김형렬(金亨烈) 다려 일러 가라사대 신명(神明)에게 요(料)를 줄 터이니 여산 윤공삼(礪山 尹公三)에게 가서 돈을 얻어오라 하시는데 마침 이 때에 김병욱(金秉旭)이 전주 거부 백남신(全州 巨富 白南信)을 거천 하는지라, 천사(天師)께서 고의(故意)로 크게 취(醉)하사 벗은 발로 대삿갓을 쓰시고 병욱(秉旭)의 집에 오사 누어 일지 아니하시니 때에 남신(南信)이 이르거늘, 병욱(秉旭)이 천사(天師)에게 손의 이름을 고(告)하니 천사(天師)께서 이러 앉으사 처음 대하는 예(禮)를 베풀지 아니하시고 문득 가라사대 그대가 내 상(相)을 평(評)하라 하시니 남신(南信)이 왈(曰) 상리(相理)를 알지 못하나이다. 천사(天師) 가라사대 상리(相理)는 참되지 못하나니 속평(俗評)을 하라. 남신(南信)이 왈(曰) 속평(俗評)에 얼굴이 방정(方正)하고 풍후(豊厚)하면 부(富)하리라 하고, 미간 인당(眉間 印堂)에 불표(佛表)가 있으면 귀(貴) 하리라 하나니 이로 보면 부귀쌍전(富貴雙全) 하시리로소이다. 이 때에 김형렬(金亨烈) 김병욱(金秉旭) 장흥해(張興海)가 시좌(侍坐)하니라.
천사(天師) 소왈(笑曰) 군(君)의 상(相)을 평(評)하면 입가로 침이 부억부억 나오니 이는 소가 아구 삭이는 격(格)이라, 가히 부호(富豪)가 되리로다 하시고 또 가라사대 내 쓸 곳이 있으니 금 십만양(金 十萬兩)을 가져오라 하시니 남신(南信)이 묵연(黙然)히 앉았다가 왈(曰) 칠만양(七萬兩)을 들임이 어떠하나이까. 천사(天師)께서 그 불가(不可)함을 말씀하신 대 남신(南信)이 왈(曰) 십만양(十萬兩)을 채우려면 서울 집까지 팔아야 되겠나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許諾)하야 증서(證書)를 써서 올리니 병욱(秉旭)이 증인(證人)이 된지라. 천사(天師)께서 그 증서(證書)를 받으사 병욱(秉旭)에게 맡기시니 병욱(秉旭)이 양방(兩方)이 다 희세(稀世)의 대량(大量)이라고 탄복(嘆服)하더라. 그 후(後)에 증서(證書)는 불사르시니라.
김형렬(金亨烈)이 진묵(震黙)의 고사(故事)로써 천사(天師)께 고(告)하야 왈(曰) 전주부중(全州部中)에 한 빈리(貧吏)가 있어 진묵(震黙)과 우선(友善)하더니, 하로는 빈리(貧吏)가 진묵(震黙)에게 해빈(海濱)의 방을 구(求)함에 진묵(震黙)이 왈(曰) 사옥소리(司獄小吏)를 도모하라. 빈리(貧吏) 왈(曰) 이는 소임(所任)이니 도득(圖得)하기 쉬운 것이라 하고 그 후(後)에 옥리(獄吏)가 되었는데, 그 때 관내(官內) 부호(富豪)가 많이 가친지라. 소리(小吏)가 그들을 극력(極力)으로 두호(斗護)하니 그들이 크게 감격(感激)하야 물자(物資)를 많이 소리(小吏)에게 주니라. 그 뒤에 진묵(震黙)이 매야(每夜)에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하나식(式) 그 빛을 가두어 사람으로 하여금 발견(發見)치 못하게 하야 칠일(七日)만에 모다 숨기게 하니, 태사관(太史官)이 변(變) 을 고(告)하야 왈(曰) 이것은 상천(上天)이 재앙(災殃)을 내리심이니 천하(天下)에 대사(大赦)하야 옥문(獄門)을 열어 천의(天意)를 순(順)하사이다 함에 조정(朝廷)이 이 말을 듣고 옥문(獄門)을 대개(大開)하였다 하나이다. 천사(天師)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그러 하였으랴. 내가 이를 본받아서 한달 동안 칠성(七星)을 숨겨서 세인(世人)의 발견(發見)을 시험(試驗)하리라 하시고, 그날 밤으로부터 칠성(七星)을 다 숨기어 한 달을 계속(繼續)하되 세상(世上)에 발견(發見)한 자(者)가 없으니라.
전주 우묵곡 이경오(全州 宇黙谷 李敬五)의 유아(幼兒)가 복통(腹痛)이 있어 여러 날 대소변(大小便)을 불통(不通)하야 생명(生命)이 위독(危篤)한지라 경오(敬五)가 유아(幼兒)를 안고 와서 천사(天師)께 뵈옵고 시료(施療)하심을 청(請)한대, 천사(天師)께서 그 아이를 앞에 누이시고 손으로 배를 내리 만지시니 곳 소변(小便)을 통(通)하는지라. 천사(天師)께서 그릇에 그 소변(小便)을 받아 한곳에 두었다가 내어 본 즉 그릇 바닥에 무슨 가루가 가라안자 잇는지라. 천사(天師)께서 여러 사람더러 일러 가라사대 이것은 당(糖)이라. 어린아이가 많이 먹으면 한문(汗門)이 막히고 이러한 병(病)이 나기 쉬우니 주의(注意)하라 하시니라.
계묘 삼월(癸卯 三月)에 전주부 장효순(全州部 張孝淳)의 처(妻)가 흉통(胸痛)으로 고민(苦悶)하는지라 효순(孝淳)이 시료((施療) 하심을 청(請)하거늘, 천사(天師)께서 효순(孝淳)을 명하사 그 처(妻)와 벽(壁)을 간격(間隔)하야 서로 등져 서게 하시니 순식간에 그 처(妻)의 흉통(胸痛)낫고 효순(孝淳)이 그 증(症)을 옴겨 앓는지라. 천사(天師)께서 손으로 어루만져 곳 낫게 하시다.
계묘 사월(癸卯 四月)부터 김병욱(金秉旭)이 남원(南原)에 체류(滯留) 하면서 세금(稅金)을 독수(督收) 하니라. 이 때 박영효(朴泳孝)가 일본(日本)에 망명(亡命)하야 혁명(革命)을 도모함으로 정부(政府)는 그 당(黨)을 궁초(窮剿)하니 병욱(秉旭)이 또 연루(連累)가 된지라. 팔월(八月)에 경성(京城)으로부터 포교(捕校)가 내려와서 병욱(秉旭)을 수색(搜索)하니 전주군수 권직상(全州 郡守 權稷相)이 남원(南原)에서 독세(督稅) 한다고 말함에 포교(捕校)는 즉일(卽日)로 곳 남원(南原)에 가니라. 그 전(前) 날에 천사(天師)께서 남원(南原)에 가사 병욱(秉旭)의 사관을 찾아 문(門) 밖에서 속(速)히 나오기를 명(命)하시니, 병욱(秉旭)이 속(速)히 문(門) 밖으로 나서니 천사(天師)께서 다시 명(命)하사 그 수납(收納)한 세금(稅金)을 계산(計算)하야 관주(舘主)에게 보관(保管)케 하시고,
곧 반행(伴行)하사 들 밖에 나가되 병욱(秉旭)은 그 까닭을 모르고 다만 천사(天師)를 따라갈 뿐이라. 천사(天師)께서 병욱(秉旭)을 명(命)하사 피화(皮靴)를 벗고 초혜(草鞋)를 바꾸어 신게 하시고, 통로(通路)를 버리고 농무(隴畞)와 능곡(陵谷)으로 행(行)하야 한 소점(小店)에 이르러 점심을 잡수시고, 병욱(秉旭)의 선산하(先山下)에 이르사 그 선묘(先墓)의 소재(所在)를 물으시니 병욱(秉旭)이 대왈(對曰) 이곳이로소이다. 이에 묘소(墓所)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문 지라. 천사(天師) 가라사대 혈명(穴名)이 무엇이뇨. 병욱(秉旭)이 왈(曰) 와우(臥牛)라 하나이다. 천사(天師) 왈(曰) 그러면 우명성(牛鳴聲)을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앉아 기다리시니 문득 산하(山下)에서 우명성(牛鳴聲)이 나는지라. 병욱(秉旭)이 왈(曰) 우명성(牛鳴聲)이 들리나이다. 천사(天師) 왈(曰) 먼데서 들림은 상관 없나니라.
좀 잇다가 한 사람이 소를 끌고 묘전(墓前)으로 지나가는데 소가 크게 우니 천사(天師) 왈(曰) 혈음(穴蔭)이 이미 동(動)하였다 하시고 그 재사(齋舍)에 들어가 유숙(留宿) 하시고, 익일(翌日)에 묘직(墓直)을 명(命)하야 남원(南原)에 가서 형세(形勢)를 탐지(探知)하고 오라 하시니 묘직(墓直)이 갔다와서 경포교(京捕校)의 수색(搜索)함을 보(報)하거늘, 병욱(秉旭)이 비로소 듣고 크게 두려워 하니라. 천사(天師)께서 명하사 여교(女轎)를 준비(準備)하야 병욱(秉旭)을 태우시고 전주 상관 협항(全州 上關 悏項)에 이르러 병욱(秉旭)다려 일러 가라사대 군(君)이 먼저 서원규(徐元圭)의 집에 가서 자세히 살피라. 내 추후(추후)하야 들어가리라 하심에 병욱(秉旭)이 원규(元圭)의 집에 이르니 원규(元圭)가 대경(大驚) 왈(曰) 군(君)이 어찌 사지(死地)를 벗어났으며, 또 어찌하여 이러한 위지(危地)로 들어왔느뇨. 너무 급화(急禍)이므로 통기(通奇)할 겨를이 업서 모든 지구(知舊)와 군(君)의 가족(家族)은 크게 우민(憂民)하는 중(中)이라 하더라.
병욱(秉旭)이 그 자세한 일을 들은 즉 포교(捕校)들이 전주(全州)를 떠나서 남원(南原)에 도착(도착)할 때와, 자기가 남원(南原)을 탈출할 때가 겨우 반일(반일)을 격(격) 하였는지라. 병욱(秉旭)이 탄왈(탄 曰) 선생(先生)은 곳 천신(天神)이시라. 만일(萬一) 선생(先生)의 도우심이 아니었더면 내 어찌 사지(死地)를 탈출(脫出)하였으랴 하더라. 그 때 포교(捕校)가 남원(南原)에 이르러 병욱(秉旭)을 수색(搜索)하다가 어찌 못하고 도로 전주(全州)에 와서 군수 권직상(郡守 權稷相)을 독려(督勵)하야 각처(各處)에 훈령(訓令)과 게시(揭示)를 발(發)하며 사하(四下)로 크게 찾으니라. 그런데 서원규(元圭)의 약국(藥局)은 서천교(西川橋) 사가 통로(四街通路)에 있음으로 병욱(秉旭)은 그 유벽(幽僻)치 못함을 근심하니,
천사(天師)께서 추후(追後)로 다다르사 병욱(秉旭)다려 근심 말라 하시고 매양 석후(夕後)이면 함께 음식점(飮食店)에 임의왕래(任意往來) 하시면서 취포(醉飽) 하시되 한 사람의 아는 자도 만나지 아니하며, 또 가로(街路)로 지나실 때에 병욱(秉旭)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병욱(秉旭)은 더욱 경겁(驚怯)하야 모골(毛骨)이 소연(踈然)한 때가 만하니라. 그 후(後) 천사(天師)께서 병욱(秉旭)으로 하여금 장흥해(張興海)의 집에 이거(移居)케 하야 삼삭(三朔)을 지난 후(後) 천사(天師) 가라사대 일이 이미 풀렸으니 방심(放心)하라 하시니, 이 때는 일로전운(日露戰雲)이 정(正)히 급(急)하야 일병(日兵)이 국토(國土)를 통과(通過) 함으로 국금(國禁)이 해이(解弛)될 뿐 아니라 박영효(朴泳孝)의 혐의(嫌疑)도 풀어지니라.
그 때에 천사(天師)께서 병욱(秉旭)다려 물어 가라사대 이제 국세(國勢)가 날로 글러짐에 정부(政府)는 매사(每事)를 외인(外人)에게 의앙(依仰) 함으로 당파(黨派)가 분립(分立)하야 주의(主義)를 달리하여, 혹(或)은 일본(日本)을 친선(親善)하려 하며 혹(혹)은 노국(露國)과 친선(親善)하려 하니 군(君)은 어떠한 주의(主義)를 가졌느뇨. 병욱(秉旭)이 대왈(對曰) 인종(人種)의 별(別)과 동서(東西)의 수(殊)로 하야 일본(日本)을 친(親)함이 가(可)한가 하나이다. 천사(天師) 가라사대 군언(君言)이 유리(有利)하다 하시고 서세(西勢)를 물리치기 위(爲)하야 신명공사(神明公事)를 행(行)하시다.
계묘 칠월(癸卯七月)에 미가(米價)가 승등(昇騰)할 뿐더러 농작(農作)에 재해(災害)가 심(甚)하야 한도(旱稻)는 충재(虫災)로 후패(朽敗)하야 인심(人心)이 오오(嗷嗷) 하는지라. 천사(天師)께서 제자(弟子)다려 일러 가라사대 신축(辛丑) 이후(以後)로는 일체(一切)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내가 맡았으니 금년(今年)에는 농작(農作)이 풍등(豊登)케 하야 미상(米商)을 하야 보리라 하시고, 뇌전(雷電)을 크게 일으키시니 수일(數日)을 지나지 못하여 모든 재해(災害)가 물러가고 사야(四野)에서는 풍양(豊穰)을 노래하더라.
이 해에 고부인(古阜人) 이도삼(李道三)이 나병(癩病)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 되야 사경(死境)에 이르러 천사(天師)께 와 뵈고 시료(施療) 하심을 청(請)하거늘 천사(天師) 가라사대 나를 따르라 하시고, 도삼(道三)을 명(命)하사 누어서 자지 못하게 하였는데 식후(食後)이면 복통(腹痛)이 나고 대변(大便)에 담(痰)이 섞여 나오다가 십사일(十四日)만에 전쾌(全快) 되니라.
김병욱(金秉旭)의 차인(差人) 김윤근(金允根)이 치질(痔疾)로 누년(屢年) 신고(辛苦)하다가 천사(天師)께 시료(施療)하심을 청(請)하거늘 천사(天師)께서 매조(每朝)에 동학주문(東學呪文)을 칠편식(七遍式) 외우라고 명(命)하시니 윤근(允根)이 명(命)을 쫓아 삼사일(三四日)만에 전쾌(全快)되니라.
장흥해(張興海)의 딸이 병(病)으로 다일(多日) 고통(苦痛) 하다가 천사(天師)께 시료(施療)를 청(請)하거늘 천사(天師)께서 그 여위(女媦)를 불러오사 상하방(上下房)에서 서로 향(向)하야 안게 하시니 한시를 지나서 그 병(病)이 곳 전쾌(全快)되니라.
하로는 천사(天師)의 아우 영학(永學)이 와 뵈거늘 천사(天師)께서 한 부채에 학(鶴)을 그려주며 가라사대 네 집에 돌아가서 이 부채를 부치면서 칠성경(七星經)에 무곡파군(武曲破軍) 까지 읽어 그치고 대학(大學)을 읽으라. 그러면 도(道)를 통(通)하리라. 영학(永學)이 명(命)을 받들고 돌아오다가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들리니 남기(南基)의 아들이 그 부채를 빼앗고 주지 안는지라. 영학(永學)이 그 사실(事實)을 말한 즉 그는 더욱 탐하여 주지 아니함으로 영학((永學)은 하릴없이 빼앗기고 돌아오다.
남기(南基)의 아들이 그 부채를 부치면서 대학(大學)을 읽으니 몇 편(遍) 을 읽지 아니 하여 신력(神力)을 통(通)하야 물을 뿌려 비를 오게 하며 능(能)히 신명(神明)을 부리게 되는지라, 남기(南基)가 기뻐하여 아들로 하여금 천사(天師)의 도력(道力)을 앗게 하니 그 아들이 부명(父命)에 의(依)하야 그 부(父)와 한가지로 하운동(夏雲洞)에 오니, 천사(天師)는 마침 우묵곡(宇黙谷)에 계시다가 하운동(夏雲洞)으로 오시는지라. 남기(南基)의 아들이 천사(天師)의 오시는 소리를 듣고 도망하거늘 남기(南基)가 조차 붙들어 와 안치고 천사(天師)께 뵈니 천사(天師)께서 대파침(大破針)을 남기(南基)의 머리에 꽂아주신 후(後) 돌려보내시고, 그 아들은 그곳에 머물게 하사 신력(神力)을 다 거드시며 가라사대 남기(南基)의 집이 대파(大破)하리라 하시더니, 남기(南基)의 제수(弟嫂)가 문득 실진(失眞)하야 날마다 담장안으로 돌아다니면서 항성서라는 이상(異常)한 소리를 하니라.
천사(天師) 가라사대 내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함으로부터 일체(一切)의 아부신(餓莩神)을 천상(天上)으로 몰아 올렸으니 이 후(後)에는 인민(人民)의 기아(飢餓)로 인(因)하야 죽는 일은 없으리라 하시더라.
갑진 정월(甲辰 正月)에 경성(京城)으로부터 백남신(白南信)을 나상(拏上)하라는 공문(公文)이 전주부(全州部)에 이르는지라, 김병욱(金秉旭)이 남신(南信)다려 일러 가르되 작동(昨冬)에 나의 화난(禍難)은 증산(甑山)의 도움을 입어 면(免)하였다 하니 남신(南信)이 병욱(秉旭)을 통(通)하야 천사(天師)께 도움을 청(請)하거늘, 천사(天師) 가라사대 부자(富者)는 돈을 써야 하나니 돈 십만양(十萬兩)의 증서(證書)를 가져오라 하신 대 병욱(秉旭)이 남신(南信)에게 말 하야 십만양(十萬兩)의 증서(證書)를 바치니라. 그 후(後)로 백남신(白南信)의 화난(禍難)은 풀리고 도리어 남삼도세관(南三道稅官)이 되야 누거만(累巨萬)을 모이다. 그 후(後) 천사(天師)께서 그 증서(證書)를 불사르시니라.
갑진 정월 십오일(甲辰 正月 十五日)에 천사(天師)께서 술을 마이시고 홍몽히 주무실 새 장흥해(張興海)의 어린 아들이 급병(急病)을 발(發)하야 죽게 됨으로 흥해(興海)의 부(父)가 천사(天師)께 시료(施療)하심을 청(請)하거늘, 천사(天師)께서 누어 일지 안으시고 혼몽 중(中)에 이르사대 냉수(冷水)나 먹이라 하셨더니 흥해(興海)의 부(父)가 병아에게 냉수(冷水)를 먹인 후(後) 이어서 그 아이가 죽는지라. 흥해(興海)의 부(父)의 성질(性質)이 본래(本來) 표한(慓悍)하야 부중인(付中人)이 천동(天動)이라고 호(號)하는 터인데 그 아해의 죽음을 보고 크게 성내여 천사(天師)를 원망(怨望)하야 왈(曰) 이는 고의(故意)로 약(藥)을 그릇 일러 죽임이라. 손으로 만져 죽은 사람을 일으키며 말 한마디로 위태한 병을 고침은 내가 실견(實見)한 바이라. 만일 우리 아이를 고의(故意)로 죽임이 아니었다면 물은 고사하고 흙을 먹였을지라도 그 신이(神異)한 도술(道術)로 능(能) 히 낫게 하였을 것이라 하고, 드디어 곤봉(棍棒)으로 천사(天師)를 난타(亂打)하야 유혈(流血)이 임리(淋漓)케 한지라.
천사(天師)께서 비로소 깨달아 일어나시니 흥해(興海)의 부(父)가 살인범(殺人犯)이라 하고 천사(天師)를 결박(結縛)하야 장방청(長房廳)에 갔다가 문득 뉘우친 듯이 끌러주며 왈(曰) 이것이 다 나의 잘못이라. 어린아이가 급증(急症)으로 죽었거늘 어찌 선생(先生)을 원망(怨望)하리요 하고 전교(前交)를 회복(囘復)하기를 원(願)하고 자기(自己) 집으로 동행(同行)하랴 하거늘, 천사(天師)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서원규(徐元圭) 집에 가서 계시다가 익일(翌日)에 전주 이동면 이직부(全州 伊東面 李直夫)의 집으로 가시니라. 대개 흥해(興海)의 부(父)가 천사(天師)를 용서(용서)하야 장방청(長房廳)으로 부터 돌아가게 한 것은 백남신(白南信)으로 부터 받은 이십만양(二十萬兩)의 증서(證書)가 있음을 알고 돈을 요구(要求)하랴 함이니라.
그 익일(翌日)에 장흥해(張興海)의 부(父)가 서원규(徐元圭) 집에 간즉, 천사(天師)께서 게시지 아님으로 대노(大怒)하야 천사(天師)를 살인범(殺人犯)으로서 도피(逃避)하였다고 사방(四方)으로 수색(搜索)하더라. 이 때에 천사(天師)의 성솔(省率)은 전주군 화전면 화정리(全州郡 花田面 花亭里) 이경오가협방(李京五家狹房)에 이거(移居) 하여 잇는데, 효순(孝淳)의 가족(家族)이 그곳에 가서 행패(行悖) 하니라. 김형렬(金亨烈)은 당초(當初) 효순(孝淳)의 난(亂)을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천사(天師)의 소식(消息)을 들으려고 화정리(花亭里)에 왔다가 효순(孝淳)의 가인(家人)에게 결박(結縛)되야 서원규(徐元圭)의 집에 가서 천사(天師)의 계신 곳을 묻되 가르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더욱 분노(憤怒)하야 형렬(亨烈)과 원규(元圭)를 무수(無數)히 구타(毆打)하니라. 이로 인(因)하야 천사(天師)의 성솔(省率)은 태인(泰仁) 굴치(屈峙)로 피화(避禍)하고 형렬(亨烈)은 원규(元圭) 집에서 승야 도피(乘夜 逃避)하고, 원규(元圭)는 나날이 그들의 행패(行悖)에 견디지 못하여 약국(藥局)을 폐쇄(廢鎻)하고 가권(家眷)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피(避)하니라.
이 때에 천사(天師)께서 이직부(李直夫)의 집에 머무시니 직부(直夫)의 부(父) 치안 노인(治安老人)이 당년(當年)의 명운(命運)을 평(評)하여 주심을 굳이 청(請)하거늘 천사(天師)께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신 이후(以後)로는 명운(命運)과 복서(卜筮)를 일체(一切)로 말씀치 아니하신 바, 이제 부득이(不得已)하사 백지 일매(白紙一枚)에 글써서 불사르시고 다시 글을 써서 긴봉(緊封)하야 주시며 가라사대 급(急)한 일이 잇거든 열어보라 하신 지라. 치안 노인(治安老人)이 급히 거두었더니 마침 그의 자부(子婦)가 난산(難産)으로 위경(危境)에 이름을 듣고 그 일에 당(當)함인가 생각하야 그 봉서(封書)를 가지고 갔다가 이미 순산(順産) 되었음으로 다시 잘 간수하였더니, 이해 세말(歲末)에 노인(老人)이 병(病)들어 매우 위독(危篤)한지라. 아들 직부(直夫)가 그 봉서(封書)를 열어보니 곳 소시호탕 이첩(小柴胡湯 二貼)이라 쓰였음으로 그 약(藥)을 쓰고 곳 쾌복(快服) 되니라. 그해 정월(正月)에 천사(天師)께서 직부(直夫)의 집에서 화(禍)를 피(避)하사 월여(月餘)를 머무시니라.
이해 이월(二月)에 천사(天師)께서 굴치(屈治)에 게실 새 아우 영학(永學)다려 대학(大學)을 읽으라 하셨더니 영학(永學)이 듣지 않고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릉묘기(嚴子陵廟記)를 읽는지라. 천사(天師)께서 듣고 가라사대 죽은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발이오, 묘기(廟記)는 제문(祭文)이라. 멀지 아니 하여 영학(永學)은 죽으리라 하시고 이도삼(李道三)을 명(命)하사 글 한 구(句)를 전(傳)하시니 곳 골포사장전유초 혼반고국조무인(骨布沙場氈有草 魂返故國吊無人)이라 하였더라. 처음부터 영학(永學)이 천사(天師)께 향(向)하야 도술(道術)을 배워 달라고 자조 청(請)하나 천사(天師)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대학(大學)을 읽게 하셨는데, 영학(永學)은 명(命)을 어기고 술서(術書)를 공부(工夫)함으로 이 시(詩)를 보내어 계구(戒惧)케 하심이라. 그 후(後)에 갑칠(甲七)이 천사(天師)를 모시고 굴치(屈治)에 가니 영학(永學)이 임사(臨死)한지라. 천사(天師)께서 그 입에 무지(拇指)를 대여 가라사대 이 무지(拇指)를 떼면 곳 죽을지니 뜻에 있는 대로 유언(遺言)하라 하신 대 영학(永學)이 부모(父母)에게 말을 마친 후(後) 무지(拇指)를 떼니 곧 사망(死亡)하니라.
김형렬(金亨烈)은 장효순(孝淳)의 난(亂)을 격은 후(後) 천사(天師)와 그 성솔(省率)이 어데 잇는지 몰라서 각처(各處)로 돌아다니며 찾다가, 고부(古阜)에서 갑칠(甲七)을 만나 천사(天師)의 게신 곳을 알고 고부 두승산 하촌려(古阜 斗升山 下村廬)에서 천사(天師)께 뵈고 후약(後約)을 정(定)하고 돌아가니라
甑山天師公事記 《 9 》 군자(君子)와 천진(天眞) (0) | 2023.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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