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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月先生文集(해월선생문집) 卷之四(권지사) 7장 15~16편 / 선생이시여! 대를 잇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해월선생의 시문

by 雪中梅 2024. 5. 30. 01:25

본문

海月先生文集(해월선생문집) 卷之四(권지사) 7장 15편

 

奉呈大人(봉정대인)

 

花有雙頭秀(화유쌍두수)  人分一體生(인분일체생)

顔眉渾不卞(안미혼불변)  啼笑又同聲(제소우동성)

每問誰先後(매문수선후)  頻看失弟兄(빈간실제형)

幾時如我長(기시여아장 今日願渠成(금일원거성)

孔釋應齊送(공석응제송)  夔龍想倂名(기룡상병명)

兩難衰緖慶(양난쇠서경 雙璧暮年榮(쌍벽모년영)

此是慈烏望(차시자오망 難堪厲夜情(난감려야정)

不才猶補國(부재유보국 兵後劇添丁(병후극첨정)

 

 

海月先生文集(해월선생문집) 卷之四(권지사) 7장 16편

 

   松奴(송노)  幷序(병서)

 

余於赤鼠中司馬(여어적서중사마)  海上孽族券以乳(해상얼족권이유)

下弱奴而慶之曰(하약노이경지왈)  若生任公(약생임공)  丘史(구사)

厥後十餘年(궐후십여년)  不問所之意(불문소지의) 已爲他使(이위타사) 

今秋始得之則(금추시득지즉)  齒已二九矣(치이이구의)  性甚騃且頑(성심애차완)

言不敏(언부민)  步不疾(보불질)  馬不能養(마불능양)  書不能傳(서불능전)

驅之百事(구지백사)  似無一能(사무일능)  而惟負薪差可焉(이유부신차가언)

盖於海邊(개어해변)  鹽戶盛(염호성)  居斧木熬波(거부목오파)

少時之業然也(소시지업연야)   余因取李白(여인취이백)

白首臥松雲之句(백수와송운지구)  而名之曰(이명지왈)  松雲(송운)

余將移家正明里(여장이가정명리)  有山海(유산해송)  竹之勝(죽지승)

白首他年(백수타년)  優游丘壑(우유구학)  日課(일과신유)

取煖牛突(취난우돌)  亦我養老之(역아양노지)

一資松雲之名(일자송운지명)  盖誌此也(개지차야)

 

羲經貴見幾(희경귀견기)  老訓垂知止(노훈수지지)

所以掛冠子(소이괘관자 扁舟杳烟水(편주묘연수)

却來聽朝鷄(각래청조계)  此輩不足齒(차배부족치)

辟穀尙願留(벽곡상원류)  張良豈眞避(장양기진피)

辟 : 임금 

 

 

先生何代(선생하대인)

선생이시여! 대를 잇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草屋滄海是(초옥창해시)

초옥(草屋)의 창해(滄海)로다.

 

攬却萬古心(람각만고심)

사람들의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마침내 잡아서 한 순간에 바꿔 놓으니,

 

暫爲蒼生起(잠위창생기)

창생(蒼生)들은 새로운 사고로 계발(啓發)되는구나.

 

光陰不可恃(광음불가시)

도시 세월(歲月)이란, 믿을 것이 못 되나니,

 

進退我當義(진퇴아당의)

사람을 버리거나 쓰는 일(進退)을, 나의 임금은 마땅히 의(義)로써 한다네,

 

問汝皓首郞(문여호수랑)

(皓) 머리를 한 그대에게 묻노니,

 

霜靴有何味(상화유하미)

깨끗한 신발(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漁樵野外伴(어초야외반)

야외에서 땔나무(樵) 와 고기잡이를 하는데

 

鷗鷺江邊戱(구로강변희)

갈매기(鷗)와 해오라기(鷺)는 강변에서 서로 희롱하는구나.

 

至樂自有地(지락자유지)

지극한 즐거움이 또한 있는데,

 

趙盂焉賤貴(조우언천귀)

조그만 밥그릇(盂)에 어찌 귀천이 있겠는가?

 

吾當矢不諼(오당시불훤)

나는 맹세코 거짓을 말하지 않노니

 

說與松雲記(설여송운기)

이렇게 송운기(松雲記)에 기록하여 밝히는 바이다

 

.........................

 

 

이 글은 해월(海月) 선생께서

하인인 노인의 의지할 곳을 꾸미며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이백(李白)의 시(詩)에서 나오는 「백수와송운(白首臥松雲) 이라는 글귀에서,

송운(松雲)이라는 글귀를 따서 이름을 짓고,

그에 대한 글을 남긴 것이 이 송운기(松雲記)이다.

 

 

이 글 내용에서,

 

선생이시여 누가 대(代)를 잇는 사람입니까?  라고 하니,

 

초라한 집에 사는 푸른 바다(滄海)라고 한 것이다.

 바다(海) 불사약(不死藥) 불로초(不老草)인  정도령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미 앞에서 밝힌 바가 있는 것이다.

이 바다가 되는  정도령이, 한없는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사고방식을 한 순간에 바꾸어서,

창생(蒼生)들을 계발(啓發)시킨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하였으며,

람을 쓰고 버리는 일에도 정도(正道)를 따를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전(傳)하는 말은 남을 속이는 거짓말이 아니니, 그대로 믿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해월(海月) 선생이 밝힌, 그와 같은 초라한 집에 사는 정도령 나타나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지금(只今)으로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과학을 실질적인 최고의 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여기지만,

현재의 과학이란 철학(哲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과학이 현재보다 훨씬 더 발전하여서, 철학(哲學)의 원리(原理)를 증명하고

규정한다면, 철학(哲學)도 또한 과학(科學)이 되는 것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 갑을가(甲乙歌) Ⓟ116을 보면,

 

『哲學科學(철학과학) 硏究者(연구자) 一朝一夕(일조일석) 退去日(퇴거일)

과학(科學)이나 철학(哲學)을 연구(硏究)하는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물러가게 된다고 하였다.

 

疑問解決(의문해결) 落心思(낙심사)

의문(疑問)이 해결(解決)되니 소망(所望)이 없어져 낙심(落心)하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토록 힘들여서 일생(一生)을 과학(科學), 철학(哲學)을 연구하고 공부해 왔지만,

정도령의  신선세계(神仙世界)가 오게 되면

하루 아침에 쓸모가 없는 학문(學文)으로 전락(轉落)하여 낙심(落心)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사람을 쓰는 일에도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 등이 통(通)하지 않고,

오직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높이 들여 쓰여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자연의 질서가 새로이 바뀌게 되는 해인시대(海印時代)에는 만사지(萬事知) 되어,

지금의 자연질서를 바탕으로 한 학문(學文)인 과학(科學), 철학(哲學)은 하루 아침에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고 하였으니, 깊이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라고 전(傳)하는 말인 것이다.

 

오늘의 세태(世態)를 본다면 우리가 현실(現實) 속에서 피부로 느끼다시피,

(善)한 사람이 오히려 손해(損害)를 보고,

(惡)한 자가 이득(利得)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불의(不義)가 더욱 극성(極盛)을 부리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幸福)을 위해서는, 타인이 불행(不幸)하게 되는 것 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힘으로, 정치의 힘으로, 부조리를 바로잡아 보려고 많은 노력을 해 왔고,

또한 수많은 수도자(修道者)들이 산(山)속에 들어가서,

일생 동안 인간의 근본(根本)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써 보았지만,

확실한 방법(方法)은 제시(提示)하지 못한 채,

결국 자신들의 문제도 해결 하지 못하고 다만 죽어간 것이다.

 

자신(自身)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기대(期待)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구세주(救世主)가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 문제를 풀 수가 없다 보니 결국은 타력적인 구세주가 이 세상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세상에 악(惡) 극성(極盛)하는 것은,

하나님과 마귀(魔鬼)와의 싸움에서 지상권(地上權)을 마귀에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서 천지(天地)가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천지(天地)의 위(位)가 바로잡히기 위해서는,

먼저 마귀(魔鬼)한테 잃어버린 지상권(地上權)을 회복(回復)하기 위하여

광복(獨立)운동을 하시는데, 마귀(魔鬼)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삼역대경(三易大經)의

삼극궁을영부장(三極弓乙靈符章) Ⓟ257을 찾아보면,

 

『愚夫愚民(우부우민)은  視而不見(시이불견)하며  聽而不聞(청이불문)하야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여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들려 주어도 모르면서,

 

但知無爲而化(단지무위이화)하니  可勤可笑也(가근가소야)로다

다만 때가 되면 다 저절로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는데,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라고 했다.

 

不勞自得(불로자득)은  古今一無也(고금일무야)

또한 세상에는 공부(工夫)하지 않고 아는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는 것이며,

 

勤勤孜孜(근근자자)야  不失天時(불실천시)하라』

노력(勞力)하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은 없으니, 부지런히 노력하여 천시(天時)를 잃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처절한 신(神)의 싸움을 알지 못하고,

안 보이고 안 들린다고 하여 단지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하며,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저절로 된다고 알지만,

이와 같이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동안,

숨어서 힘들이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서 온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그들의 은혜를 입어 좋은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정을 깊이 깨달으라는 것이다.

세상에 힘 안들이고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상권(地上權)을 잃어버리셨기 때문에,

이 땅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사회정의(社會正義)가 바로 설 리가 없는 것인데,

 

모든 것은 정의(正義) (神) 주권(主權) 회복(回復)할 때에

 

건곤(乾坤)이 정위(正位)하고,

산택(山澤)이 통기(通氣)하고,

목화(木火)가 통명(通明)하며,

수화(水火)가 기제(旣濟)하고,

곤상건하(坤上乾下)인 지천태(地天泰)의 천정역(天正易) 시대,

즉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정도(正道)를 되찾을 때가 되면,

지기순환(至氣循環)하여 만사지(萬事知)가 된다고 한 것이다.

 

 

 

정북창(鄭北窓) 선생의 궁을가(弓乙歌)를 보면,

 

『天地定位(천지정위) 分野時(분야시) 弓弓乙乙(궁궁을을) 뉘가알꼬 ......

 終變始復(종변시복) 開闢數(개벽수)는 道下地(도하지)에 있는배라』

 

 

이 글의 내용을 보면,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는,

즉 천지의 위(位)가 바로잡히는 지천태괘(地天泰卦)가 되는 수(數)가 도하지(道下地)에 있다고 한 것이다.

즉 도하지(道下地)의 궁궁을을(弓弓乙乙)이신 정도령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가 바로 무위이화(無爲而化) 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인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마귀와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삼태극(三太極)즉 황극(皇極)시대 지상천국(地上天國),

미륵(彌勒)의 용화세계(龍華世界)인 지상불국정토(地上佛國淨土)라 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올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민요(民謠) 속에 그 뜻을 숨겨서 후손(後孫)들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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