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dos1130 黃汝一 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 정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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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e-one8899 해월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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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중기의 문장가(文章家)로 이름난 해월(海月) 선생에 대해, 늦게나마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됨을 우선 기쁘게
여긴다.
해월(海月) 선생은 강원도(江原道)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현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나셨으며,
생가(生家)는 현재 경북(慶北) 문화재(文化財) 자료 1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울진(蔚珍)은 서울과 거리가 천리(千里)밖에 되지 않으나, 우리 나라 동쪽에 치우쳐 교통이 불편한 궁벽(窮僻)한 곳이다.
우리는 울진(蔚珍)이라고 하면, 근래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이 울진분이라는 것을 다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울진(蔚珍)의 명망(名望) 받는 선비로서 당대(當代)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공훈(功勳) 또한 크게 세웠던, 해월(海月) 선생이 세간(世間)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번에 「해월(海月) 선생의 시문(詩文)」이란 책으로나마, 해월(海月) 선생이 어떠한 분이신지 조금이나마 알리게 됨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의 발문(跋文)을 쓰신 이세택(李世澤: 퇴계 이황 선생의 8대손으로 영조 때 대사헌
(大司憲)을 지냄) 선생은, 자신은 이미 백사(白沙) 선생의 문집(文集) 속의 조천록(朝天錄)에서 백사(白沙)와
월사(月沙)와 해월(海月) 선생이 주고 받은 주옥(珠玉) 같은 글을 이미 보았으며, 세 분 선생의 문장(文章)과
그 덕(德)은 서로 우월을 가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백사(白沙)와 월사(月沙) 선생의 문집(文集)은 이미 간행(刊行)되어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어 사람들이
외울 정도이나, 유독 해월(海月) 선생의 글만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개탄(慨歎)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쓰고 있는 것이다.
영조(英祖) 때 인물로, 퇴계(退溪) 선생의 학문에 정통한 대학자(大學者)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쓴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서문(序文)을 보면, 나라가 중종(中宗)과 선조(宣祖) 사이에 크게 번성했으니,
이 때에 태어나 진유(眞儒)가 되고, 이름 있는 명경(名卿)이 되고, 문장(文章)으로 나라를 빛낼 만한 재주를 지녀
그 시대의 원대(遠大)한 계획(計劃)을 아름답게 꾸몄다고 했다.
또한 해월(海月) 공(公)의 저서들이 대부분 병란(兵亂)으로 불타버려 다만 몇 권의 책만이 남았지만,
그 문장(文章)이 바다처럼 넓어서 끝간 데를 알 수 없고,
시(詩) 또한 갈고 닦지 않으면서도 입으로 내뱉으면 시문(詩文)을 이루었으며,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백호(白湖) 임제(林悌) 등과 더불어 그 시대(時代)를 구가(驅駕)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특히 임제(林悌)와 절친한 사이로, 하루는 그의 집을 방문하니 선생을 보고는 쓰고 있던 책을 감추었다가,
해월(海月) 선생의 절조(節操)있음을 아느지라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 때 해월(海月) 선생이 그 책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붓을 들어 발문(跋文)을 써 주었으니,
그 책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이었다.
또한 이세택(李世澤) 선생이 쓴 발문(跋文)에서도, 해월(海月) 선생의 문장(文章)은 많은 사람 중에 단연
뛰어나서, 한 번 물결이 일면 그 끝간 데를 알 수 없고, 그 시(詩)는 정묘하고 고우며, 문장(文章)이나 언어가
아름다우며, 말(馬)이 빨리 달리는 것 같아, 당송인(唐宋人)의 득의(得意)한 마음이나 기개(氣槪)가 있으며,
남겨진 문집(文集) 속의 시(詩)를 읊조려 보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마음속이 매우 신묘(神妙)하며,
그의 기량(器量)은 깊고 깊어 잠기는 것이 곧 바로 맑고 푸른 바다물 속에 밝은 달이 밝게 비추어 더불어 같이
흐르는 것을 상상(想像)할 수 있으니, 그 달빛과 물 속의 그림자(光影)가 얼마나 기이한가! 라고 하였다.
한편 백사(白沙) 선생의 문집(文集)에서도, 해월(海月) 선생과 월사(月沙) 선생이 자신보다 시문(詩文)이 뛰어
나다고 했다.
하지만 이보다는 해월(海月) 선생의 자신을 다스린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뛰어났고,
효제(孝悌)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性品)에 근본(根本)을
두었고, 재주(才)는 족히 임금을 도와 나라를 빛낼만 하고 (贊猷華國), 식견(識見)은 도리(理)를 바르게 하고,
이를 흡족히 밝혀 당세(當世)의 이름 있는 선비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단 맑고 깨끗한 글(淸文)에 기이(奇異)한 기운이 솟아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감복(感服)케
할 뿐만이 아니라고 하여, 문장(文章)도 뛰어났지만 오히려 인품(人品) 즉 충의(忠義)나 효제(孝悌), 식견(識見)과
재주는 더욱 탁월(卓越)하다고 하였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대한 일화(逸話)도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던 해,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함경도(咸鏡道)에 있었는데, 함경(咸鏡)
감사(監司) 류영립(柳永立)은 해월(海月) 선생의 철령(鐵嶺) 고수(固守)의 조언(助言)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해월(海月) 선생의 말대로 함경도(咸鏡道)가 왜(倭)의 수중에 들어가고 왜(倭)가 이르기도 전에 토병(土兵)의
난(亂)으로 군량미(軍糧米) 등을 약탈당하게 되자, 후회(後悔)하고 탄복(歎服)했다 한다.
또한 반란(叛亂)을 일으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그리고 그 종신(從臣)들을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넘긴 국경인(鞠景仁)과 함연수(咸連守) 등을 해월 선생의 계책으로 회령 유생
신세준(申世俊) 등으로 하여금 장사들을 규합해 참살(斬殺)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함흥(咸興) 토적(土賊) 진대유(陳大猷)와 그의 아들 계수(桂樹) 부자가 왜(倭)에게 투항해서
백성들에게 행패가 심했는데, 친분이 있는 한덕원(韓德遠) 덕구(德久) 형제를 통해 글을 보내 화복(禍福)을
늘어 놓으며 꾸짖고 타일렀느나 듣지 않자 김수준(金秀俊) 등을 보내 이들 부자(父子)를 포박해 넘기게 했다.
이보다 앞서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이 계수(桂樹)를 아병(牙兵)으로 삼아 데리고 다니자,
해월(海月) 선생이 계수(桂樹)에게는 불순한 기(氣)가 있다며 가까이 두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박순남(朴順男)이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후에 결과적으로 해월(海月) 선생의 말처럼 되자, 모두 선생의 선견(先見)에 탄복했다 한다.
형조정랑(形曹正郞)으로 재직시 명(明)나라 장수(將帥) 이영춘(李榮春)과 화전(火戰) 비방(秘方)을 논(論)
하다가 그 사용법(使用法)이 매우 뛰어남을 보고,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요청해 허락을 받아서 그 화전(火戰)
비법(秘法)을 기록(記錄)하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보내고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방어에 대한 글을
올려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월(海月) 선생은 문장(文章)에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병법(兵法)에까지 뛰어났던 것이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이 선조(宣祖)에게 청하기를, 병영(兵營)은 한순간에 만 가지 일이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文武)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해월(海月) 선생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주청(奏請)하여 불가피하게 권율(權慄)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진주에서 권율(權慄) 장군의 병영에 있을 때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어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에 있었는데 이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함께 이야기하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수전요해(水戰要害: 지세가 험조하여 지키기에 편하고 공격하기 힘든 곳)을 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정왜록(征倭錄)에 실려 있다.
명(明)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사건(誣告事件: 조선이 옛 고구려(高句麗) 땅인 요동(遼東)을 회복(回復)
하려고 왜병(倭兵)을 불러들여 함께 명(明)을 치려하며, 조선(朝鮮)에 파견되어 명나라 군사를 지휘하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결당하여 명나라 황제를 속이고 대적한 지가 오래라는 등의 내용)을
변무(辨誣)하기 위하여, 백사(白沙), 월사(月沙) 선생과 서장관(書狀官)으로서 함께 다녀왔는데,
그 무고(誣告) 사건의 변무(辨誣)에 있어서 실질적 주재자(主宰者)는 해월(海月)이라고, 백사(白沙) 선생의
조천록(朝天錄)에 기록되어 있다.
동래(東萊) 부사로 재직시에는 전란(戰亂) 후의 피폐해진 고을 백성들의 주거(住居)를 안정시켰는데,
일처리의 엄숙(嚴肅)함과 굳은 의지(意志)에 왜인(倭人)들이 삼가 공경(恭敬)하며 복종(服從)하였으며,
또한 학교(學校) 세우는 일을 늦출 수 없다며, 학문(學問)하는 선비를 찾아서 사대(使臺)라는 직함을 주어
훈도(訓導)의 소임을 맡기고, 나라의 재정(財政)을 축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일을 시켜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한다.
영천(永川) 지방에서 날뛰던 도적떼들도 해월(海月) 선생이 영천(永川) 군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러한 해월(海月) 선생에 대해, 그 당시 영의정(領議政)을 두 번이나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은,
울진, 삼척, 평해로 이어 온 관동(關東)의 청숙지기(淸淑之氣)가 차고 넘칠 정도로 모여서 그친 곳이 평해(平海)의
사동(沙銅)인데 그 기(氣)를 받은 사람이 다름아닌 해월(海月) 선생이라고 사동기(沙銅記)에서 밝혀 놓았다.
이와 같이 이렇게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해월(海月) 선생이지만, 애석하게도 오랜 동안 관각(館閣: 홍문관
(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을 이름)에 있으면서 왕을 보필하여 마음속에 담긴 바를 다 펴지 못하고 내직(內職)
이나 외직(外職)도 오래하지 못하였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만고(萬古)에 변지않는 푸른 바다와 맑은 달을
토납(吐納)하여 자기 것으로 삼아 조석(朝夕)으로 그 뜻을 만나니 매우 심오(深奧)하다 했다.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의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감추어 두고 드려내지 않는 것이 있음을 어찌 알겠는가? 라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은 서문(序文)에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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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海月) 선생의 서문(序文) 《 2 》 (1) |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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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유록 서문(序文) ....해월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0) | 2023.03.07 |
서 문 (序文) (2) | 2020.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