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dos1130 黃汝一 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 정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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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風水地理)로 크게 이름이 난 사람으로는 일반적으로 도선(道詵),
무학대사(無學大師) 같은 고승(高僧)이나, 토정(土亭), 정북창(鄭北窓) 같은 이인(異人)이라 불리는
선각자(先覺者)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영상(領相)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일국의 재상(宰相)이,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대가(大家) 못지 않게, 우리 나라 동해안(東海岸) 산세(山勢)의 흐름을 한눈에 알아
보고 남겨둔 기록(記錄)이 있다.
비결(秘訣)이라는 형태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적은 글인 기문(記文)이란 형태로 썼다는 데서 그 의의(意義)가 있으며,
그 기문(記文)은 바로 이조(李朝) 선조(宣祖) 때의 문장가로 이름이 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의
사동기(沙銅記)이다.
먼저 그 전체 내용을 살펴보고 그 글에서 뜻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사동기(沙銅記)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에 유배(流配)와서 지은 글이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海, 1539~1609, 중종 34~광해군 1)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의 아들로,
자(字)는 여수(汝受), 호(號)는 아계(鵝溪),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또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선생의 조카로,
5세 때부터 숙부(叔父)인 토정(土亭)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서예(書藝) 글씨를 매우 잘 썼고, 또한 문장(文章)에 아주 능(能)하였으므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1561년 식년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이조정랑, 직제학, 대사헌, 도승지, 대사간, 이조, 예조,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낸 선조(宣祖)조의 명신(名臣)이다.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의 사동리의 전경
自眞珠而仙槎而箕城。緣海而南。雖無名山大川瑰麗絶特之觀。而關東淸淑之氣。於是焉窮。氣之所窮。盛而不過。必蜿蟺扶輿。磅礡鬱積者。固其所也。余之初謫箕也。由望洋亭而南可六七里。過所謂沙銅者。見其岡巒邐迤。如伏而起。如躍而趨。如鸞翔鳳翥。環拱回抱而成一洞府。心竊奇之。以爲蜿蟺扶輿。磅礡鬱積之氣。必鍾於物鍾於人。而物不能獨當。又必有魁偉才俊之士生其間。及見黃內翰尊府公。白髮脩眉。韶光滿面。匈無畦畛。和氣充然。知其能有子而有家也。越二年夏。內翰以秋部員外。來省親。一日訪余焉。員外之中乙酉科也。余忝爲座主。已知富於文詞。而猶未得其爲人。及相遇於斯。留十數日。與之披露心腹。服其文義之卓然。器量之宏偉。然後始信蜿蟺扶輿磅礴之鍾於人者。不在於他人。而在於員外也。員外嘗構堂於沙銅山西馬岳之下。以爲奉侍杖屨之所。余嘗升堂而望焉。山不奇而秀且佳。洞不邃而寬且長。高者突然成阜。下者頹然成陂。深者爲溪澗。窪者爲畦壟。而茫茫大洋。常在衽席之下。漁村蜑戶。隱映沙際。釣艇鷗鷺。來往浦口。眞勝觀也。至於淡粧幽香。碧玉琅玕。蒼髥白甲。虯卵金丸。環擁羅列於左右。則雖無絲竹管絃之鬧。亦足以供一堂之樂也。吾觀員外公年尙少。尊府公纔踰耳順。康健無恙。其不可捨簪笏而眷戀于此也審矣。蜚英昭代。正色立朝。上以獻替冕旒。下以展布所學。使湖山淸淑之氣。轉而爲國家之元氣。然後歸來是堂之中。釀秫酒。釣銀鱗。與諸婦諸孫。歌呼於尊府公之膝下。則洞之溪山景物。一草一木。無不欣欣於壽席之前矣。抑淸淑之氣。雖出於天地山川之所鍾。而其培養作成則在於人。苟能因吾之所受而善養以振作之。俾不至於餒乏間斷。則人才之蔚然繼出。可卜也。將見芝蘭玉樹。參差交映於員外之庭。而黃氏之福。蓋未艾也。黃君其勉之。洞之以沙銅名。取於山也。馬岳。根於白巖而東袤五十餘里。面海而蹲。川出馬岳之西北而流于海。海口有孤山。山北有浦。西京其名也。月日。竹皮翁記。
自眞珠而仙槎而箕城(자진주이선차이기성)。緣海而南(연해이남)
雖無名山大川瑰麗絶特之觀(수무명산대천괴려절특지관) 而關東淸淑之氣(이관동청숙지기)。
삼척(眞珠진주)로부터 울진(仙槎) 평해(箕城기성) 관동(關東)의 청숙지기(淸淑之氣)가 이 곳에서 그쳤다.
於是焉窮(어시언궁)。氣之所窮(기지소궁)。盛而不過(성이불과)。
청숙지기(淸淑之氣)가 그쳐서 넘칠 정도로 성하나(窮盛궁성) 빠져 나가지는 않았으니(不過불과),
必蜿蟺扶輿(필원선부여)。
진실(眞實)로 꿈틀거리는(蜿蟺:원선) 상서(祥瑞)로운 기운(氣運)이(扶輿:부여)
磅礡鬱積者(방박울적자)。固其所也(고기소야)。
가득히(磅礡:방박) 쌓여서는(鬱積:울적) 단단하게 굳어진(固) 자리가 바로 이 곳이다.
余之初謫箕也(여지초적기야) 由望洋亭而南可六七里(유망양정이남가육칠리) 過所謂沙銅者(과소위사동자)。
내가 처음 유배(流配)된 곳이 평해(平海)이다.
망양정(望洋亭)을 거쳐 남쪽으로 6∼7리를 지나면 이른바 사동(沙銅)이다.
見其岡巒邐迤(견기강만리이) 如伏而起(여복이기)。
그 곳을 보면 낮은 산(岡巒:강만)이 연이어 있는 것이, 마치 엎드렸다가 일어나는 것 같고,
如躍而趨(여약이추)。如鸞翔鳳翥(여환상봉저)。
뛰어올랐다가 달리는 것 같고, 난새(鸞)가 선회(旋回)하며, 봉황(鳳凰)이 날아 올랐다가
環拱回抱而成一洞府(환공회포이성일동부)。
혈(穴)자리인 대궐(大闕)을 지키기 위해(環拱:환공),
돌아와서는 품어 안고 있는 것(回抱:회포) 같았으며, 또한 한 동네(一洞)를 이루었으니,
心竊奇之(심절기지)。以爲蜿蟺扶輿(이위원선부여)。磅礡鬱積之氣(방박울적지기)。
보통과는 다른 뛰어난 정혈(正穴)처인 그 한가운데는 어느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竊:절).
그래서 생각하기를 꿈틀거리는(蜿蟺:원선) 상서(祥瑞)로운 기운이(扶輿:부여) 가득 차 막혀 있는 기운은,
必鍾於物鍾於人(필종어물종어인)。而物不能獨當(이물불능독당)。
필히 물(物: 명당의 혈)에 모이게 되어 사람에게 기(氣)를 모아 주는 것이나,
물(物: 명당)은 홀로 주장할 수 없으니,
又必有魁偉才俊之士生其間(우필유괴위재준지사생기간)。
또 필히 체구가 크고 훤칠하며, 재주가 뛰어난 선비가 그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다.
及見黃內翰尊府公(급견황내한존부공)。
이제 황내한(黃: 內翰-예문관 별칭)의 부친(尊府公)을 뵈니,
白髮脩眉(백발수미)。韶光滿面(소광만면)。
백발(白髮)과 긴 눈썹에 온화하고 따스함이 얼굴에 가득하고,
匈無畦畛(흉무휴진)。和氣充然(화기충연)。
가슴속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 부드러운 기운이 충만하여,
知其能有子而有家也(지기능유자이유가야)。
능(能)히 그에게는 훌륭한 아들이 있고, 그의 집이 그 곳에 있음을 알겠더라.
越二年夏(월이년하)。內翰以秋部員外(내한이추부원외)。
2년이 지난 후 여름(1594, 선조 27년, 甲午年, 7월)에 내한(內翰: 海月)이 추부원외(秋部員外: 형조정랑)가 되어
來省親(래성친)。一日訪余焉(일일방여언)。
부모님을 찾아뵈러 와서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員外之中乙酉科也(원외지중을유과야)。
을유(乙酉, 1585년, 선조 18)년에 원외(員外: 海月)는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다.
余忝爲座主(여첨위좌주)。
나는 욕되게도 과거(科擧)시험의 시험관(試驗管)이었기에,
已知富於文詞(이지부어문사)。
이미 그가 문사(文詞)에 있어서는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으나,
而猶未得其爲人(이유미득기위인)。
오히려 그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及相遇於斯(급상우어사)。留十數日(유십수일)。與之披露心腹(여지피로심복)。
이에 이 곳에서 서로 우연히 만나, 10여 일을 같이 머물면서 속마음을 털어 놓고서야,
服其文義之卓然(복기문의지탁연)。器量之宏偉(기량지굉위)。
그 문의(文義)는 높고 원대(遠大)하였으며, 그리고 재기(才器)와 덕량(德量)이 뛰어나고 훌륭함에 탄복하였다.
然後始信蜿蟺扶輿磅礴之鍾於人者(연후시신원선부여방박지종어인자)。
그런 후에야 비로소 꿈틀거리는 상서(祥瑞)로운 기운(氣運)이 모여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不在於他人(불재어타인)。而在於員外也(이재어원외야)。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원외(員外: 海月)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員外嘗構 堂於沙銅 山西馬岳 之下(원외상구당어사동산서마악지하)。
원외(員外: 海月)는 일찍이 사동산(沙銅山) 서쪽 마악산(馬嶽山) 아래에 집을 지어 놓고,
以爲奉侍杖屨之所(이위봉시장구지소)。
주위의 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삼았다.
余嘗升堂而望焉(여상승당이망언)。
나는 일찍이 마루에 올라서서 멀리 내다 보았다.
山不奇而秀且佳(산불기이수차가)。
산(山)은 기이하지는 않았으나 빼어나게 아름답고,
洞不邃而寬且長(동불수이관차장)。
마을은 깊숙하지는 않으면서도 넓고 또 한가했다
高者突然成阜(고자돌연성부)。下者頹然成陂(하자퇴연성피)。深者爲溪澗(심자위계간)。
높은 곳은 우뚝하게 언덕을 이루고, 낮은 곳은 유순하게 물가를 이루며, 깊은 곳은 계곡(溪谷)이 되고,
窪者爲畦壟(와자위휴롱)。而茫茫大洋(이망망대양)。常在衽席之下(상재임석지하)。
시루 구멍같이 밭두둑과 언덕을 이루었으며, 망망대양(茫茫大洋)은 항상 발 아래에 있으며,
漁村蜑戶(어촌단호)。隱映沙際(은영사제)。
어촌(漁村)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모래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고,
釣艇鷗鷺(조정구로)。來往浦口(래왕포구)。眞勝觀也(진승관야)。
낚시질하는 거룻배와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오락가락하는 포구(浦口)는, 진실로 뛰어난 경관이다.
至於淡粧幽香(지어담장휴향)。
한 담담한 곳(淡粧)에 이르러면 그윽한 향기가 나고,
碧玉琅玕(벽옥낭간)。蒼髥(창염)。白甲虯卵(백갑규란)
벽옥(碧玉), 낭간(琅玕)의 푸른 수염(창염)과 백룡의 새끼가 자라고 있으며,
金丸環擁(금환환옹)。羅列於左右則(라열어좌우즉)。
금환(金丸: 달)이 호위하며 지키고 좌우(左右)에서 둘러싸고 있은즉,
雖無絲竹管絃之鬧(수무사죽관현지료)。亦足以供一堂之樂也(역족이공일당지락야)。
비록 관현(管絃) 악기의 시끄러움은 없지만, 한 집의 즐거움을 가득히 보내 주는 것이다.
吾觀員外公年尙少(오관원외공년상소)。
내가 원외(員外: 해월)를 보니, 공(公)의 나이는 아직 젊고,
尊府公纔踰耳順(존부공재유이순)。康健無恙(강건무양)。
그의 아버지는 겨우 60을 넘어 건강(健康)하고 병이 없으니,
其不可捨簪笏而眷戀于(기불가사잠홀이권연우)。
그 때의 상황(狀況)이 그에게 있어서는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연연할 수 있게 되어 있지를 않았다.
此也審矣(차야심의) 蜚英昭代(비영소대)。正色立朝(정색입조)。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보니 당대에 높이 영달해서 안색(顔色)을 엄정히 하고 벼슬에 나아가,
上以獻替冕旒(상이헌체면류)。
위로는 임금을 잘 보좌(補佐)하여 옳은 일을 권하고 그른 일은 못하게 하며,
下以展布所學(하이전포소학)。
아래로는 배운 바를 널리 베풀어(展布) 행하니,
使湖山淸淑之氣(사호산청숙지기)。轉而爲國家之元氣(전이위국가지원기)。
호수와 산의 청숙지기(淸淑之氣)가 바뀌어서 국가(國家)의 원기(元氣)가 된 것이다.
然後歸來是堂之中(연후귀래시당지중)。釀秫酒(양출주)。釣銀鱗(조은린)。
그런 후에 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찰기장으로 술을 빚고 은빛 물고기를 낚고
與諸婦諸孫(여제부제손)。歌呼於尊府公之膝下則(가호어존부공지슬하즉)。
존부공(尊府公: 부친)의 슬하(膝下)에서 모든 며느리와 손자들과 더불어 노래 부른즉,
洞之溪山景物(동지계산경물)。一草一木(일초일목)。無不欣欣於壽席之前矣(무불흔흔어수석지전의)。
장수(長壽)를 비는 잔치에서는 동네의 계곡(溪)과 산의 풍경(景)과 사물(物),
모든 풀(一草)과 모든 나무(一木)가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抑淸淑之氣(억청숙지기)。雖出於天地山川之所鍾(수출어천지산천지소종)。
청숙지기(淸淑之氣)가 비록 천지(天地)에서 나와 산천(山川)에 모여진 바,
而其培養作成則在於人(이기배양작성즉재어인)。
그것을 잘 길러 배양(培養)해서는 사람에게 주게 되는 것이니,
苟能因吾之所受而善養以振作之(구능인오지소수이선양이진작지)。
진실로 능(能)히 자신이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잘 기르고 펼쳐 일으킨다면,
俾不至於餒乏間斷則(비불지어뇌핍간단즉)。
굶어 죽을 정도의 가난과 자손이 끊어질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되는즉,
人才之蔚然繼出(인재지울연계출)。可卜也(가복야)。
인재(人才)가 계속하여 많이 이어 오는 것을 가히 점칠 수가 있다.
將見芝蘭玉樹(장견지란옥수)。參差交映於員外之庭(참차교영어원외지정)。
장차 원외(員外: 海月)의 뜰에서 선량한 자제(子弟)들이 연이어 빛나는 것이 보이지만,
而黃氏之福(이황씨지복)。
황씨의 복(福)은 다한 것이 아니라,
蓋未艾也(개미애야)。黃君其勉之(황군기면지)。
오히려 미래(未來)의 애(艾: 낫)인 것이니, 황군(黃君)은 힘쓸지어다.
洞之以沙銅名(동지이사동명)。取於山也(취어산야)。馬岳(마악)。
동네 이름이 사동(沙銅)으로 지어진 것은 마악산(馬嶽山: 말 모양)에서 취했다.
根於白巖而東袤五十餘里(근어백암이동무오십여리)。面海而蹲(면해이준)。
마악산(馬嶽山)의 뿌리는 백암산(白巖山)이며, 동쪽으로 50여 리를 뻗쳐서 바다와 면하여 웅크리고 있으며,
川出馬岳之西北而流于海(천출마악지서북이류우해)。
내(川)는 마악산(馬嶽山: 말모양)의 서북쪽에서 나와 바다로 흘러간다.
海口有孤山(해구유고산)。山北有浦(산북유포)。西京其名也(서경기명야)。月日(월일)。竹皮翁記(죽피옹기)
바다 어귀에는 산이 하나 있으며, 산 북쪽에는 포구(浦口)가 있고, 서쪽 언덕 서경(西京)이 그 이름이다.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생의 영정(影幀)
조선 중기 선조시에 토정 이지함 선생의 장조카로 영의정을 세번이나 지낸 아계 이산해 선생
그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아계 선생은 1592(壬辰, 선조 25)년 당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발발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로 유배(流配)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원도 산천을 둘러볼 수 있었고,
또한 2년 후인 1594(甲午, 선조 27)년 7월에 휴가를 받아 귀향한 해월선생을 만나 보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는 이 곳 유배(流配) 생활에서 1595년 선조 28년 을미(乙未)년에 풀려나,
다시 영돈녕부사로 복직(復職)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가 1600(선조 33)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가 처음 이 곳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流配)되어 올 때,
관동(關東)의 산천경계(山川境界)를 두루 살피며 삼척(三陟), 울진(蔚珍)을 거쳐 평해(平海)에 이른 것이다.
그가 관동(關東)의 산천경계(山川境界)를 두루 살피다가, 그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바로 강원도(江原道)의 산천정기(山川精氣)가 모여서는, 하나의 큰 혈처(穴處)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혈처(穴處) 자리가 어느 정도의 자리인지, 어떠한 자리인지를 아계 선생은 아주 조심성 있게,
그리고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도록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밝힌 것이다.
그가 일국(一國)의 영상(領相)이면서도 크게 놀라워한 것이다.
우리에게 사동기(沙銅記)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학(易學)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안목(眼目)을
갖고 있는지를 객관적(客觀的)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학(易學)이나 풍수지리(風水地理)라 하면 아주 인식이 좋지가 않고,
천한 사람이나 하는 학문쯤으로 매도(罵倒) 당하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사대부(士大夫) 가문(家門)에서는 오히려 수치(羞恥)스럽게 여기고, 숨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여건(與件)이다 보니 학문을 많이한 사대부(士大夫)의 유학자(儒學者)들은 천문(天文), 지리(地理),
복서(卜筮) 등에 매우 능통하면서도 말이나 글에는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이다.
사동기를 보면 무언가 몇 군데를 아계 선생이 중점을 두고 필히 전(傳)하고 싶어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서
아계 이산해(李山海) 선생의 사동기(沙銅記) 중에서 크게 의미를 두고 전하는 곳을 한 번 찾아보겠는가?"
하고 명산 선생님이 밀씀하시자,
지리(地理)에 밝은 듯한 사람이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관동(關東)하면 강원도를 말하는데 강원도(江原道)의 청숙지기(淸淑之氣)가 해월(海月) 선생의 생가(生家)에
모여 있다고 했으니, 강원도(江原道)하면 금강산(金剛山)이 아닙니까?
백두산(白頭山) 금강산(金剛山)의 정기(精氣)가 크게 모여 있으며,
또한 그 자리가 난새(鸞)가 선회(旋回)하고, 봉황(鳳凰)이 날아 올랐다가는 돌아와서 혈처인 그 대궐을 지키고,
알을 품에 안은 모습이라고 했으니, 보통의 명당(明堂) 같지는 않은데,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명산 선생님이 말씀을 이으셨다.
"사동기(沙銅記)의 첫 부분을 보면, 관동(關東)의 청숙지기(淸淑之氣)가 모이고 난새(鸞)가 선회하며
봉황(鳳凰)이 날아 올랐다가는 돌아와서 품에 안은 것 같은 형국(形局)을 이룬다 한 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성격 급한 사람이 물었다.
"봉황(鳳凰)이 돌아오는 자리라면 어떤 곳입니까?"
이에 명산 선생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차근차근 설명하시기 시작하셨다.
"풍수지리서(風水地理書)에 보면,
봉황(鳳凰)이 돌아오는 자리라면 틀림없이 성인군자(聖人君子),
대인(大人)이 나오는 자리라는 것이다."
조선의 풍수(朝鮮의 風水: 1990, 村山智順 著, 崔吉城 옮김)를 보면,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봉황(鳳凰)은 희대의 영조(靈鳥)이다.
만일 이 새가 나오면 인간(人間)에게는 군자(君子)가 나오고 성인(聖人)이 나온다고 한다.
보금자리로 돌아옴은 새끼를 만들기 위함이다.
때문에 지형의 소응(所應)은 성인군자(聖人君子)를 출생시키는 곳으로 대단히 좋은 땅이다. ⓟ217』
『또한 유물신앙(類物信仰)의 일종으로
성스러운 물건이 나오는 것은 장차 성인(聖人)이 나오려는 징조로 간주되었다.
서물신앙(瑞物信仰)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전해지며 그것이 전래된 것이다…….
이 서물신앙(瑞物信仰)에 따르면 서물(瑞物) - 예를 들면
성스러운 별, 성스러운 새, 성스러운 짐승 들이 세상에 나오면 성인(聖人)이 나와서 천하태평을 이루는 때다.
이 때는 천지(天地)의 음양(陰陽)이 잘 조화를 이룬다.
황제의 시대에 봉황(鳳凰)의 보금자리가 나타나고,
하우(夏禹) 때 신귀(神龜)가 강가에서 나오고,
복희(伏羲) 때 용마(龍馬)가 나타나고,
문왕(文王) 때 봉황(鳳凰)이 기산(岐山)에서 울고,
공자(孔子) 때 기린(麒麟)이 출현했다는 것은,
모두 그 때가 좋고 음양(陰陽)이 조화되어 천하태평(天下泰平)을 이룬 때인 것이다.
이 서물신앙(瑞物信仰)은 유형신앙(類形信仰)의 으뜸인 만큼, 또한 풍수(風水)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즉 서물(瑞物)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음양(陰陽)이 조화된 것이기 때문에 산(山)도 역시 이와 같은 서물(瑞物)이
출현하는 곳, 즉 서물(瑞物)의 형태를 이루는 것은 저절로 음양(陰陽)이 조화된 곳이다. ⓟ187∼188』
『또 ≪비봉형(飛鳳形)≫≪무학형(舞鶴形)≫은
모두 영조(靈鳥)로서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나오는 극히 경하(慶賀)할 만한 때가 아니면 춤추지 않는다.
이런 모양의 도읍이 있다면 이 모양에 상응하는 훌륭한 인물이 나올 운명이다.
그러나 새는 날아가기 쉽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영구히 머물도록 난구(卵丘)를 만든다든지
서지(棲池)를 제공한다든지 할 필요가 있다. ⓟ627』
『대산리(大山里)에는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숲을 만들어(지금의 죽령) 이 비봉(飛鳳)으로 하여금 영원히
머물게 했다고 한다. (대나무의 열매는 봉황의 밥이 된다고 한다) ⓟ623』
그런데 사동(沙銅) 마을은
난새(鸞)가 선회하며, 대궐을 지키기 위해 봉황(鳳凰)이 돌아와서 품에 안은 형국(形局)을 이루었는데,
해월(海月) 선생의 집이 그 정기(精氣)가 모여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해월(海月) 선생의 생가(生家)가,
진정으로 봉황(鳳凰)이 날아와 알을 품는 형(形)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바로 성인군자(聖人君子) 대인(大人)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무언(無言)의 암시(暗示)가 있는 것이다.
대개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나오는 자리는 발음(發蔭)이 늦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인(聖人)이 나오는 자리는 대대로 높은 지위(地位)와 부(富)를 이루는 자리와는 다른 것이다.
흔한게 성인(聖人)이라면, 누가 성인(聖人)이라 하겠는가?
성인(聖人)은 천년(千年)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계(鵝溪) 선생도 그의 그러한 뜻을 글 속에 슬쩍 집어 넣었다.
해월(海月) 선생의 생가(生家)는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곤궁(困窮)하게 살고,
대(代)가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자식(子息)들이 그의 뜰 안에 가득하지만,
그를 두고 해월(海月) 선생의 복(福)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인(聖人)이 나오는 집안은 주로 가난하고 순박(淳朴)하게 대대로 살아오는 집안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부귀(富貴)와는 좀 거리가 먼 것이다.
덕(德)을 쌓고 대대로 이어 오다 보면, 어느 때엔가는 성인(聖人)이 나오게 되고,
그 가문(家門)에 큰 경사(慶事)가 따르는 것이다."
"사동기(沙銅記) 안에
『至於淡粧幽香(지어담장유향) 碧玉琅玕蒼髥(벽옥낭간창염)
白甲虯卵(백갑규란) 金丸環擁(금환환옹) 羅列於左右則(라열어좌우즉)……』 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이 뜻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자
명산 선생님의 명쾌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구절(句節)이 바로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家門)에 어떠한 성인(聖人)이 나오고,
또한 그 집터가 어느 정도의 큰 명당(明堂)인가를 밝힌 글이다.
아계(鵝溪) 선생께서 해월(海月)의 생가(生家)에 이르니, 담담(淡)하고 그윽한 향기가 났으며,
또한 벽옥낭간창염(碧玉琅玕蒼髥)이라고 했는데,
대나무를 표현한 말 같으나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격암유록(格菴遺錄)의 초장(初章)과 정각가(精覺歌) 등을 보면,
황정경(黃庭經)과 도덕경(道德經)을 보라고 강조했다.
이 두 경전(經典)은 하나님의 예언(豫言)의 말씀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예언서(預言書)라는 것은, 미래(未來)에 되어질 일을 써 놓은 글이라는 것이다.
그 미래(未來)에 되어질 일(事)에는 또한 그 일을 이룰 자(者)가 있는 것이고,
또한 주어진 때, 즉 시(時)가 있는 것이다.
도교(道敎)의 경전을 집대성한 도장(道藏)에는,
황정내경(黃庭內經), 외경(外經), 중경(中經), 둔갑연신경(遁甲緣身經)의 네 편이 실려 있으며,
부상대제군(扶桑大帝君)이 양곡신선왕(暘谷神仙王)에게 명하여 위부인(魏夫人, A.D. 252~334)에게
전한 것이 황정내경(黃庭內經)이라 했다.
본래는 태상황정내경옥경(太上黃庭內景玉經)인데 줄여서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
또는 황정내경(黃庭內經)이라고 하는데 도서(道書)로서 아주 신비(神秘)하고 신묘(神妙)한 느낌을
주는 책으로, 황정경의 핵심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황정내경인 것이다.
황정내경(黃庭內經)의 은장장(隱藏章)을 보면,
『淡然無味(담연무미) 天人糧(천인량)
이 글의 뜻은
「담담(淡)한 것이 맛이 없으니 천인(天人)의 양식(糧食)이다.
子丹進饌肴(자단진찬효)
자단(子丹)이 나아가 음식과 술안주(饌肴)를 차리니,
正黃(정황)
그것이 바로(正) 황(黃)이며
乃曰琅玕(내왈낭간) 及玉霜(급옥상)
이를 일러 낭간(琅玕) 및 옥상(玉霜)이라 한다.
태상(太上) 隱環(은환) 八素瓊(팔소경)
태상(太上)이 환(環)에다, 팔소경(八素瓊)을 숨겨 두었는데,
태상(太上)이 숨겨 놓은 고리 즉 그 환(環)에는 팔소의 경(瓊)이 있고,
漑益八液(개익팔액)……』
더욱이 팔액(八液) 즉 팔소(八素)의 액(液)이 흘러내린다」 라고 한 것이다.
이란 구절이 나온다.
이 은장장(隱藏章)은 격암유록(格菴遺錄)의 은비가(隱秘歌)와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한 것을 숨겨, 그 뜻을 잘 모르게 한 장(章)인데,
아계(鵝溪) 선생의 글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의 자단(子丹)이란,
사람으로 보면 심장(心臟: 바로 사람의 마음이 담긴 臟(장)이라는 말임)을 뜻하고,
또한
적자(赤子), 단원(丹元)이라고도 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그가 내놓은 음식과 술안주(饌肴)가 바로 황(正黃)인데,
이것이 천인(天人)의 양식(粮食)이고,
이를 다른 말로 낭간(琅玕) 및 옥상(玉霜)이라고 했다.
또한 태상(太上) 즉 하나님이, 그 환(環)에다가 팔소경(八素瓊)을 숨겨 두었다고 한다.
그러면 낭간(琅玕)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더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자.
황정내경(黃庭內經) 약득장(若得章)을 보면
『璇機玉衡(선기옥형) 色琅玕(색낭간)
선기(璇機)와 옥형(玉衡)의 모습이 낭간(琅玕)이다.
瞻望童子(첨망동자) 坐盤桓(좌반환)
동자(童子)를 바라보니, 즐거운 모습(盤桓:반환)으로 앉아 있기에 묻기를,
問誰家子(문수가자) 在我身(재아신)
그대는 누구집 자식인가 하니 내 몸에 있도다.
此人何去(차인하거) 入泥丸(입니환)』
이 사람(此人)이 어디로 갔는고 하니 니환(泥丸)에 들어 갔도다.
라고 하였는데,
선기옥형(璇機玉衡)이 낭간(琅玕)이라고 하였으며,
낭간(琅玕)이란 또한 좋은 옥(玉)을 뜻하기도 하며, 또한 주수(珠樹)를 뜻하기도 한다.
이 아이가 니환(泥丸)으로 들어갔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먼저 선기옥형(璇機玉衡)이란 무엇인가?
선기옥형(璇機玉衡)이란
옥(玉)으로 만든 고대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기계인데,
이는 또한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뜻하는 말이다.
천문서(天文書)를 보면,
선기(璇機)는 천추(天樞)라 하고,
옥형(玉衡)은 두병(斗柄)이라고 하는 것이다.
≪노자 중경(中經)≫ 제13장을 보면
'선기(璇機)는 북두군(北斗君) 즉 북두칠성으로,
하늘의 후왕(侯王)이며, 사람 또한 있으니 배꼽 안에 사람의 후왕(侯王)이 있다고 하였다. '
북두칠성(北斗七星)인 이 아이가 니환(泥丸)으로 들어 갔다고 하였는데,
니환(泥丸)이란 어디를 두고하는 말인가?
황정경(黃庭經)의 경실장(瓊室章)을 보면
『瓊室之中八素集(경실지중팔소집)
泥丸夫人當中立(니환부인당중립)』
이라고 했는데,
경실(瓊室) 한 가운데 팔소(八素)가 있으며
니환(泥丸) 부인이 당당히 그 한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다.
경(瓊)이란 좋은 옥(玉) 또는 옥(玉)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이니,
경실(瓊室)이란 좋은 옥(玉)을 간직하는 장소를 이르는 말이다.
경실(瓊室)은 또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重要)한 부위인 뇌(腦)를 이르는 말이다.
즉 이마의 정중앙인 니환(泥丸)을 말하는데,
그 니환부인(泥丸夫人)이 한가운데 중앙에 있다고 하였다.
니환(泥丸)을 다른 말로는
상단전(上丹田)이라고도 하며,
상명당(上明堂)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상단전(上丹田)을
곤륜(崑崙), 증산(甑山), 황방(黃房), 자금성(紫禁城), 황궐(黃闕), 곡신(谷神), 천곡(天谷),
천근(天根), 옥경산(玉京山), 자부(紫府), 천부(天符), 요지(瑤池) 등등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팔소(八素)란
본시 외단파(外丹派)의 도가연단(道家煉丹)의 팔종석(八種石)으로,
곧 주사(朱砂), 웅황(雄黃), 자황(雌黃), 공청(空靑), 유황(硫黃), 운모(雲母), 융염(戎鹽),
초석(銷石)을 이르는데, 바로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의 원료(原料)를 이르는 말들이다.
이 팔소(八素)를 또한 팔경(八瓊)이라고도 하며 또한 내단(內丹)을 의미하기도 한다.
동덕령(童德寧)은
≪황정경발미(黃庭經發微)≫에서 말하기를,
「내단(內丹)의 팔경(八瓊)은
곧 천일(天一)의 진수(眞水)이니,
곧 환단(環丹)의 옥액(玉液)이라 했다」
즉
천일(天一)의 진수(眞水)란, 하상공(河上公)의 도덕경(道德經) 풀이에서,
천일(天一)은 도(道)의 아들인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격암(格菴) 선생은 격암유록(格菴遺錄) 초장(初章) ⓟ25에,
『天下一氣(천하일기) 再生身(재생신)』
이라 하여
세상(天下)에 일기(一氣)인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다시 온다(再生身)고 하였다.
또한 삼역대경(三易大經) 천지운기장(天地運氣章) ⓟ283에서,
『夫七星者(부칠성자)난 北極水星也(북극수성야)니
天一生水故(천일생수고)로 一曰主星也(일왈주성야)오
二曰樞星也(이왈추성야)오 三曰紫微星也(삼왈자미성야)오……』
이라 하여
천일(天一)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미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곳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리잡고 있는, 신성(神聖)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 곳이 우리 나라의 상단전(上丹田)에 해당하는 곳으로 북두칠성의 터(北斗墟)이며,
또한 대봉황의 터(大鳳墟)라는 말이다.
또한 이 환(環)이란 말은 가운데가 뚫린, 고리 모양의 옥(玉)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손가락에 끼는 금가락지 모습인 것이다.
둥근 고리 안을 경실(瓊室)이라 하고,
그 경실(瓊室) 한가운데를 태상(太上) 즉 하나님이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곳에 불사약(不死藥) 불로초(不老草)의 원료인 팔소(八素)가 있다고 한 것이니,
즉 명당(明堂)의 혈(穴) 자리인 해월(海月)선생의 생가(生家)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라고 말하자마자
다른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끼어 들어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아∼ 그러니까
아계(鵝溪) 선생이 하나님의 아들인 백룡(白龍)의 새끼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지극히 알기 어려운 황정경(黃庭經) 속에 숨겨진 말들을 간추려서,
후세의 우리들에게 은밀하게 알려주려 하신거군요." 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아계(鵝溪) 선생의 박식(博識)함과 그리고 몰래 숨겨 은밀히 전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고뇌(苦惱)를 느낄 것 같다며 웅성거렸다.
그 때 갑자기 성격이 급한 듯한 한 사람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나라의 상단전이 어딘지는 알겠는데, 중단전(中丹田)과 하단전(下丹田)은 어디입니까?"
"중단전(中丹田)과 하단전(下丹田)은 해월(海月)선생께서 자세히 밝혀놓았으니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하지."
라며 다음 이야기를 차분히 이어 갔다.
"또한 이 곳에 백룡(白龍)의 새끼가 자라고 있으며,
금환(金丸)이 둥그렇게 호위하며 지키고 있으며, 좌우(左右)를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금환(金丸)이라면
우선 달을 뜻하기도 하고,
또한 금으로 만든 거울(金鏡), 금으로 만든 둥근 것을 의미하는데,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인 단(丹)을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달(月)과 금거울(金鏡)은 다 같이 하나님의 아들을 뜻하는 말이다.
격암유록(格菴遺錄) 라마단이(羅馬單二) ⓟ47에,
『天以鑑之善惡(천이감지선악) 各行報應(각행보응)』
하늘이 감(鑑) 즉 거울로 사람들의 선악(善惡)을 비추어 보아,
각자 행(行)한 대로 보응(報應)한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 깊게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이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유독 해월(海月)선생의 집만 달이 둘러싸고 지키고 있다는 것인가?
달이란 누구나 볼 수 있고 느끼고 하는 것이지,
단순히 달빛이 비치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느 집인들 어느 곳인들 비추지 않겠는가?
특별히 누구의 집은 비추고 비추지 않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계(鵝溪) 선생이 특별히 숨겨진 사실을 전하려 하는 뜻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해월(海月) 선생의 집에서 숨겨진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고 명산 선생님이 말씀하시자
다들 수긍(首肯)하는 모습이었다.
"사동기(沙銅記) 끝 부분에
『將見芝蘭玉樹(장견지란옥수) 參差交映於員外之庭(참차교영어원외지정)。
而黃氏之福(이황씨지복)。蓋未艾也(개미애야)。』
라는 말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십시오."
지리에 밝은 듯이 보이는 그 사람의 요청에
명산 선생님은 흔쾌히 답변해 나갔다.
"장차 해월(海月) 선생의 자제(子弟)들이 그의 뜰에 연이어 비추겠지만
그것을 두고 아계(鵝溪) 선생께서는 해월(海月) 선생의 복(福)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진실로 해월(海月) 선생의 복(福)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즉 미래(未來)에 거두어 들일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애(艾)자인데,
이 말은 동사(動詞)로는 수확(收穫)한다, 거두어들인다, 베어들인다 라는 뜻이고,
명사(名詞)로는 풀을 베는 낫, 즉 옛날의 농기구(農機具)인 것이다.
식물(植物)로는 쑥(애-艾)을 의미한다.
그러니
「개미애야(盖未艾也)」라는 말은
'애(艾)'를 명사(名詞)로 보면, 황씨의 복(福)은 오히려 미래(未來)의 낫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라고 명산 선생님이 묻자
그는 다시 질문을 했다.
"황씨의 복 해월(海月)선생과 풀 베는 낫과는 대체 어떤 연관(聯關)이 있습니까?"
하고 재차 묻는 것이다.
그러자 명산 선생님이 다시 대답하셨다.
"아계(鵝溪) 선생이 묘(妙)한 말을 전한 것이지. 밝힐 수도 없고, 알고도 안 밝힐 수도 없으니,
알 사람만 알라고 전했다고 볼 수 있지.
선현참서(先賢讖書) 중 수명진주출세결(受命眞主出世訣)에,
『避身之計(피신지계) 利在田田(이재전전)
말세(末世)에 몸을 피신(避身)하는데 이로움이 전전(田田)에 있다고 하였는데,
解(해)
이 의미를 풀어 설명하면,
牛性在野(우성재야)
우성(牛性) 즉 정도령이 들(野)에 있다고 하였다.
農機在田(농기재전)』
즉 밭(田)에 농기구(農機)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밭에 있는 농기구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격암유록(格菴遺錄) 계룡론(鷄龍論) ⓟ95를 보면,
『鷄龍白石(계룡백석) 武器故(무기고)로
계룡(鷄龍)의 흰 돌이란 무기(武器)이며,
田(전) 末弓者(말궁자)
전(田)이란 말세의 궁(弓)이라는 말인데,
田鎌(전겸)이라
또한 이 궁(弓)이라는 말은
밭에서 수확(收穫)하는 연장인 낫(鎌)이라고 한 것이다.
토정(土亭) 선생의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과 동차결(東車訣)을 보면,
『讖曰(참왈)
예언서에 이르기를(讖曰)
李氏之運(이씨지운) 有三秘字(유삼비자) 松家田三字也(송가전삼자야)
이씨운(氏之運)에 비밀스런 글자(秘字)가 송가전(松家田) 석자인데,
松先利於倭(송선리어왜)
먼저 송(松)은 임진왜란(倭)때 이롭고,
家中利於胡(가중리어호)
가(家)는 병자호란(胡)때 이로우며,
田末利於凶(전말리어흉)
전(田)이란 말세(末)에 흉(凶)에서 이로운데,
凶者兵器者也(흉자병기자야) 兵器者田鎌也(병기자전겸야)』
흉(凶)이란 병기이며, 병기(兵器)란 밭의 낫(田鎌)이라고 하였다.
즉
격암유록(格菴遺錄)과 토정(土亭) 선생의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생을 추수(秋收)하는, 다시 말해 말세(末世)의 인간(人間)을 심판(審判)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정도령을 낫(鎌, 艾)이라는 말로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양백(兩白), 양산(兩山), 전전(田田), 궁자(弓者), 낫(鎌, 艾)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인 것이다.
성경(聖經)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으니 염두(念頭)에 두기 바란다.
요한계시록 14장 14~16절에,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金) 면류관(冕旒冠)이 있고,
그 손에는 이(利)한 낫(이가 날카로운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天使)가 성전(聖殿)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音聲)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穀食)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穀食)이 거두어지니라』"
"네, 그렇게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군요.
그러면 그 애(艾)자가 식물(植物)로는 쑥(애-艾)이라 하였는데,
그 쑥이라는 뜻과 정도령과는 또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쑥이라는 글자가 다른 글자로는, 우리가 잘 아는 봉래산(蓬萊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봉래산의 봉(蓬)자가 쑥 봉(蓬)자인 것이다.
봉래산은 바로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으로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산(山)의 이름이지 사람과는 직접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산(山)이란 말은 신(神)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냥 보통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왕(王)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격암유록(格菴遺錄)의 궁을도가(弓乙圖歌) ⓟ79를 보면,
『弓弓之圖詳見(궁궁지도상견)이면 左山右山兩山(좌산우산양산)이니
所謂兩山兩白(소위양산양백)이요 亦謂兩山雙弓(역위양산쌍궁)이라』
진본정감록(眞本鄭堪錄) 무학추론부(無學追論賦)에,
『山爲田弓(산위전궁)
즉 산(山)이라는 것이 밭(田)의 궁(弓)이고,
田爲山弓(전위산궁)』
밭(田)이라는 것도 산(山)의 궁(弓)이라고 하였다.
즉 산(山), 전(田), 궁(弓), 석(石), 겸(鎌), 애(艾) 등은 다 같은 뜻으로 쓰인 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하는 매명(埋名) 즉 은어(隱語)들인 것이다.
봉래(蓬萊)에 대한 말은 해월(海月) 선생께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뒤에 이야기하겠다."
명산 선생님이 말씀을 마치자마자
또 한 사람이 물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은 어떻게 그정도까지 다 알 수 있었을까요?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 책을 열심히 본다면 그와 같이 알 수 있습니까?"
"아무리 책을 많이 보아도, 막상 지리답사(地理踏査)를 나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땅의 모습과 책의 이론과는
서로 겉도는 것이다. 우리가 비결서(秘訣書)를 보면, 특별한 경우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지리답사(地理踏査)를 하다 보면, 기이(奇異)한 체험(體驗)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는 경우가 있다.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좋은 길지(吉地)에 들어서면 갑자기 고요해지면서 밝은 빛이 보이고,
기쁨의 희열(喜悅)이 솟으며, 등쪽이 이상해짐을 느끼곤 하는데, 정확히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때에는 책의 이론(理論)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직관(直觀)으로나 안다고 할까?
감각(感覺)으로나 안다고 할까?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을 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체험(體驗)을 한 것 같아서 소개를 하겠다. "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崔昌祚(최창조), 서해문집)≫란 책을 보면,
『진짜 확실한 자리 즉 별세계(別世界)는 궁극적으로 오직 순수한 체험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진짜 확실한 자리에는 비술적(秘術的)인 빛의 기미가 있다.
왜 비술적인가. 그것은 직관(直觀)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덕이 훌륭하고, 물이 좋고, 태양이 아름답고, 바람이 부드럽다.
그리고 하늘은 새로운 빛을 띠고 있다.
즉 별세계(別世界)이다.
혼돈 속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속에는 명랑한 기운이 맴돈다.
그런 곳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뜨인다.
앉으나 서나 마음이 즐겁다.
여기에 기(氣)가 모이고 정(精)이 쌓인다.
빛이 가운데에 비치며 비술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그 위쪽이나 아래쪽 또는 오른쪽이나 왼쪽은 그렇지 않다.
손가락 하나보다 크지 않고, 한 숟갈 정도의 분량에, 이슬방울 같고, 진주알 같고,
갈라진 틈사이로 스며드는 달빛 같고, 거울에 반사되는 호수면 같다.
그것을 가지고 놀려고 하면 마치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없애려고 해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라. 표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자리의 드러남이며,
모든 풍수, 기술, 범주, 그리고 합리적 설명이 거기 종속되고
거기에 비추어서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바로 그 체험이다. ⓟ35』
『17세기 중국의 한 술사(術士)가 길지(吉地)에 관하여 표현한 다음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자리에는 비술적(秘術的) 빛의 촉감(觸感)이 있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으나 말로 표현은 안 된다.
산은 밝고 물은 맑았으며 태양은 아름다왔다.
미풍(微風)이 감미로왔고, 하늘은 새로운 빛을 머금었다. 별천지(別天地)였다.
혼돈(混沌) 속의 평화(平和), 평화(平和) 속의 축제기분, 그 장소에 들어서니 새로운 눈이 떠지는 듯하다.
앉거나 서거나 즐거운 마음이다.
기(氣)가 보였고 본질(本質)이 집중되었다.
중앙(中央)에 빛이 오르고 비술(秘術)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이것은 명백히 인간과 자연의 극단적인 조화를 지칭한 말이다. ⓟ164∼165』
『한편 이런 주장도 있다.
진실로 좋은 자리는 궁극적으로 오직 순수(純粹)한 체험(體驗)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진짜 좋은 땅에는 신비(神秘)스러운 빛의 기미(機微)가 있다는 것이다.
왜 신비적인가 하면 그것은 직관적(直觀的)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502』"
다들 아계(鵝溪) 선생의 글 내용을 알고는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아계(鵝溪) 선생은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대한 안목(眼目)은 탁월(卓越)하였으나, 그러한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아계(鵝溪) 선생이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까지 밝았는지는,
먼저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또한 집안 내력을 더듬어 알아보면 수긍이 쉽게 가게 될 것이다.
아계(鵝溪) 선생은 5세 때부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 1517~1578, 중종 12~선조 11)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한다.
토정(土亭) 선생하면 세간(世間)에는 토정비결(土亭秘訣)로 유명한 분이다.
사람들이 정초에 1년의 신수를 토정비결(土亭秘訣)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나라에 전해지는 비결(秘訣) 즉 예언서(預言書)의 상당 부분이, 토정(土亭) 선생의 저작(著作)으로
전해진다.
그 비결(秘訣)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도령 즉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內容)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다.
토정(土亭) 선생
그러나 사람들은 토정(土亭) 선생하면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물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막연히 그가 전설상의 인물쯤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설(傳說)상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사대부(士大夫) 가문(家門)의 명문대가(名門大家) 출신(出身)인 것이다.
토정(土亭) 선생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6대손이고,
형 지번(之蕃)은 청풍(淸風) 군수를 지냈으며,
형 지번(之蕃)의 두 아들 중, 산해(山海)는 영상(領相)을, 산보(山甫)는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토정(土亭) 선생 자신도 포천(抱川)과 아산(牙山) 현감을 지냈다.
토정(土亭) 선생은 어려서 부친(父親)을 잃고, 형(兄) 지번(之蕃)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으며,
학문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러나 형 지번(之蕃)의 권고(勸告)에 따라,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로 밤을
세워 공부하는 것이 예사였다고 한다.
그는 서화담(徐花潭) 선생에게서 잠시 수학(受學)하였을 뿐 일정한 스승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복서(卜筮), 율려(律呂), 산수(算數), 지음(知音), 관상(觀相),
약방문(藥方文)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부문(部門)이 없었으며, 특히 그는 선견지명(先見之明)에
있어서는 타(他)의 추종(追從)을 불허(不許)하는 경지(境地)였었다고 한다.
토정(土亭) 선생에 대한 글은, 토정 선생의 현손(玄孫)인 정익(禎翊)이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토정집(土亭集)이 간행되었다.
토정집(土亭集)은 2권 1책이다.
내용은 시(詩), 설(說), 소(疏) 등이고, 부록과 유사(遺事)와 명사들의 제문(祭文), 묘갈명(墓碣銘) 등이 있다.
그 유사(遺事)를 보면 부모(父母)를 장사(葬事)지낼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장사(葬事)지낼 곳(山地)을 살펴보니 자손(子孫) 중 정승(政丞)이 두 사람 나오겠으나,
아우(季子)에게는 불길(不吉)한 것이었다.
즉 동생인 토정(土亭)에게는 불길(不吉)하고,
형인 지번(之蕃)에게는 길(吉)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정(土亭) 선생이 강력히 주장하여 하는 수 없이 그 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로 조카인 아계(鵝溪) 산해(山海) 선생과 산보(山甫)는 벼슬이 일품(一品)에 이르렀으나,
토정(土亭) 선생의 자손은 요사(夭死)하여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형인 지번(之蕃)이 토정(土亭)에게 이르기를
이 산의 오른쪽이 부족(不足)하여, 네가 그 재앙(災殃)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이것이 흠이라고 하였으나,
토정(土亭)이 이르기를
나의 자손이 가까이는 영락(零落)할지라도
5∼6대 뒤에 이르면 반드시 수(數)도 많아지고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묘지의 오른쪽편은 백호(白虎)로 여식(女息)과 계자(季子)로 보고,
왼쪽은 장자(長子)로 보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선생은 명망(名望) 있는 가문(家門)에서 태어났으며, 청명(淸明)함이 몸에 있으며,
그는 비록 규도(規度)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스스로 능히 크게 심묘(深妙)한 경지에 달하였다.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거나 얼굴빛만 보아도, 곧 그 사람의 길흉(吉凶)을 알았고,
일에 당면하여 위태한 경우에 처할 땐,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미리 아는 것이었다.
학문은 깊고 넓었으나, 굳이 강론(講論)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科擧)를 보아 출사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명리(名利)를 멀리한 것도 또한 그의 타고난 천성이다.
그의 형인 지번공(之蕃公)의 부인이 만삭(滿朔)의 경사가 있었는데,
관상(觀相) 보는 사람이 토정(土亭) 선생에게 묻기를
'공(公)의 형님의 부인에게서 산기(産氣)가 임박하였는데, 아들을 낳을까요?' 라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어제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는 일국(一國)의 정승(政丞)이 될 사람이오.' 하였다.
그 관상(觀相) 보는 사람이 묻기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 울음소리를 듣고 알았소.' 하였으니
그 아이가 뒷날의 정승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인 것이다.
그 이산해(山海) 선생은 토정(土亭) 선생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랑이었으며,
또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로 이 사동기(沙銅記)를 쓰신 분이다.
또한 토정(土亭) 선생의 묘갈명(墓碣銘) 역시도 아계(鵝溪) 선생이 쓴 것이다.
토정(土亭) 선생은 충남 보령으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는데, 식량을 싸가지고 오지 않으며,
깊은 겨울에 눈 위에 누워서도 춥다고 하지 않았으며,
그의 계자(季子) 즉 막내아들 산휘(山輝)도 지음(知音: 남의 소리를 듣고 그 뜻과 길흉을 아는 것)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에게 먹을 빌려 달라고 청하였다.
선생이 거문고를 타니 산휘(山輝)가 먹을 갖고 나왔다고 한다.
하루는 선생이 또 거문고를 타면서 마음속으로 노중련(魯仲連)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산휘(山輝)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노중련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였다.
또한 토정(土亭) 선생이 아산에 있을 때 병에 걸려 항상 구토하였는데,
몸소 구리그릇을 쳐서 아들 산휘(山輝)로 하여금 그 소리를 듣게 하였다.
산휘(山輝)가 속여 말하기를
'그 소리가 매우 화(和)하니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평안하시게 되겠습니다.' 하고는
문밖에 나와 발을 구르고 가슴을 치며 소리를 삼긴 채 슬피 울었다.
선생은 과연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 부자(父子)야 말로 세상에 흔히 볼 수 없는 기사(奇士)라 하겠다. ≪태천기(苔泉記)≫에 나온다.
이상(以上)이 토정집(土亭集)에 나오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계(鵝溪) 선생은 토정(土亭)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강원도 평해로 유배되었을 때는, 해월(海月) 선생의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해월 선생의
아버지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서로 교유(交遊)하며 가깝게 지낸 사이다.
또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은,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과 송정(松亭)에 앉아서 이야기할 때,
서울 서쪽의 안령(鞍嶺)과 동쪽의 낙봉(駱峯)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뒷날 조정(朝廷)이 반드시 동서(東西)의 당(黨)이 있을 것인데,
낙봉(駱峯)의 낙(駱)이란 자(字)는 나누면 각마(各馬)이니 서로 각각 달려나가
종말(終末)에 가서는 각각 흩어질 것이요,
안령(鞍嶺)의 안(鞍) 자(字)는 나누면 혁안(革安)이니 변혁(變革)이 있은 뒤에 편안(便安)할 것이요,
또 안령(鞍嶺)이 성밖에 있으므로 인하여 흥(興)할 것이로되, 마침내는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서당(西黨)이 오랫동안 때를 잃고 있다가,
심의겸(沈義謙)의 무리들이 명종(明宗)이 왕위(王位)에 오름으로 인하여 흥하였고,
정철(鄭澈)의 무리들은 정여립(鄭汝立)의 변을 평정하고서 크게 흥하였고,
윤두수(尹斗壽)의 무리는 임진년(壬辰年)의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함)의
난으로 인하여 흥하였으며,
또 몇 사람이 금상(今上)의 즉위 초년부터 흥하였는데,
동당(東黨)이 나뉘어 남북(南北), 대소(大小)의 골육(骨肉) 싸움으로 나누어 졌으니,
남사고(南師古)의 말이 모두 맞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어우야담(於于野談: 柳夢寅의 著書, 1559~1623)과 격암일고(格庵逸稿)에 전한다.
그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도 있다.
이산해(李山海) 설화(說話) 즉 이산해 탄생담(誕生談)인 것이다.
이산해의 아버지인 이지번(李之蕃)이 명(明)나라에 사신이 되어서 갈 때,
산해관(山海館)에서 유숙하면서 집에 있는 부인과 동침(同寢)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동침(同寢)하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이산해(李山海)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안에서는 이지번(李之蕃)의 부인을 의심하여 내치려 하였으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叔父)인 이지함(李之菡)의 만류로 참았는데,
이지번(李之蕃)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해 부인의 결백(潔白)함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이 꿈꾼 곳의 이름을 따서 '산해(山海)'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說話)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었고,
몽중(夢中) 행위가 현실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위대한 인물에 결부된 신이(神異)한 출생담(出生談)의
성격을 가진다.
그 밖에도 이산해(李山海)와 본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후손이 창성하게 된 유래를 말한 풍수설화(風水說話) 등이 있다.
또한 한국대표(韓國代表) 야담사화(野談史話: 洪曉民 篇)를 보면,
『선조조(宣祖朝) 시대에 이산해(李山海)라는 분이 있었다.
그의 자(字)는 여수(汝受)요 호는 아계(鵝溪)다.
그의 아버지는 지번(之蕃)이요,
그의 작은 아버지는 이지함(李之菡)으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는 분이다.
말하자면 이산해라는 분은 이토정의 조카였던 것이다.
이산해는 마침 당년(當年)한 딸이 있어 그의 작은 아버지 되는 토정에게 사위감을 부탁하였다.
이토정은 이 때에 풍수설 이라던지 관상과 사주등 막힐 것이 없어 사위감을 부탁한 것이다.
이토정은 그의 조카에게 부탁받고 사위감을 고르러 다니는 판이었다.
하루는 종로의 큰 길거리로 시골서 서울로 올라오는 이사바리가 있었다.
그 이사바리 위에는 한 젊은 소동(小童)이 앉아 있는데
이 아이가 얼굴이 잘생기어 일견(一見)에 재상(宰相)감이었다.
이토정은 이사바리를 좇아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 이 집은 그 때에 행세하는 양반의 집이요
그 집의 사랑채에 시골서 먼촌 일가되는 사람이 와서 드는 판이었다.
이토정은 우선 시골서 올라온 사람과 인사를 청하니
그는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으로, 일찍이 지사를 지내다 낙향하였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을 물으니
이덕형(李德馨)이라는 소년이었다.
이에 그 때에는 높은 재상으로 있는 이산해의 딸이 당년하여 사위를 고르는 판이니 그 집과 혼인(婚姻)함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요 워낙 궁한 판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살 수가 없어서 시골로 내려갔다가 시골서도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그리 넉넉지도
못한 어느 일가집의 사랑채를 하나 얻어 드는, 바로 그날에 난데없이 청혼이 들어온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이지사는 이와 같이 적빈여세(赤貧如洗)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역시 이토정도 약간 대답이 나가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일이 아니오
자기의 조카의 일이니만큼 문지(門地)나 재산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다.
이토정(李土亭)은 우선 혼담(婚談)만은 어름어름 걸쳐놓고 한다름으로 자기의 조카에게로 왔다.
이공은 자기 작은아버지의 말을 듣고 문지나 재산이 없는 것을 알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토정(李土亭)은 그 소년을 한 번 보아나 달라고 하였다.
이산해는 이 말을 듣고 이덕형(李德馨)이란 소년을 가 보았다.
가서 보니 소년의 얼굴이 과연 동탕하고 잘 생기었다.
이에 이토정의 지인지감에 감탄하여 문지나 재산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모든 비용을 들여서 혼인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렇게 남녀간엔 인물도 잘 나고 볼 것이다.
이덕형 소년이 이 때에 누구나 보고 잘 생긴 소년이라고 하게끔 되어 드디어 이산해는 이 소년을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고도 의아하여 이토정에게 묻기를,
이소년이 나중에 어찌되겠느냐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소년이 나중에 벼슬이 어느 정도 가며 국가의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되겠느냐고 하는 물음이다.
이토정은 서슴지 않고 네 나이보다 먼저 정승을 할 것이다. 하고 한마디의 언질을 주었다.
과연 이소년은 속히 진사와 문과장원을 거치어 삼십일세에 대제학(大提學, 1591, 선조 24년)이 되고
삼십팔세에 영의정(領議政, 1602, 선조 35년)이라는 놀라운 영달을 하였다.
이분이 곧 누구냐 하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막역지우(莫逆之友)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 (명종 16)∼1613(광해군 5)이었던 것이다.
이 두 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가장 그 난국을 잘 담당한 사람으로 이름난 공신(功臣)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