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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의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 )선생에 대한 시(詩)

★ 해월유록 앨범

by 雪中梅 2020. 7. 1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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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공(文翼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의 영정(影幀)

 

그가 30대이던 1590년대에 궁중화원 이신흠이 그렸다고 알려진 초상화의 모본이다.

[사진제공·한국역사문화연구원]

 

 

 

http://blog.naver.com/mjwon35 (해월 황여일의 예언 / 네이버 블로그)
http://cafe.daum.net/dkdehd63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백사(白沙)라는 호(號)보다는 오히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오성(鰲城)대감으로 더 유명한 이항복(李恒福) 선생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과의 우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절친한 사이였고,

또한 백사(白沙, 이항복) 선생과 해월(海月) 선생과도 아주 돈독한 사이였는데,

한음(漢陰) 선생도 해월(海月) 선생에 대한 어떤 기록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라고 하자

명산 선생은 웃으면서 다음의 이야기를 이었다.

 

 

〔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1561∼1613, 명종 16∼광해 5)은


조선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때의 명신(名臣)으로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으로 광주(廣州)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봉래 양사언(楊士彦)과 사귀었고,
1580(선조 1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으며,

1588년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159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국의 명(明)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해오는 등 국가를 위해(保國)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울산 순천 등지에서 작전을 돕고,

 

31세인 1591(선조 24)년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38 세인 선조 35년 1602(壬寅)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613 (광해군 5)년에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三司)에서 영창(永昌) 대군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모두 그를 모함하여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하였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한음문고(漢陰 文稿)가 있다. 〕

 



◈ 그러면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의,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 )선생에 대한 시(詩)를 보면, ◈

 

간악남회종숙정(艮嶽南回鍾淑精) 군영배출진천앵(群英輩出盡遷鶯)
청운기업군능최(靑雲器業君能最) 황갑재명자숙쟁(黃甲才名子孰爭)
한원금문삼협도(翰苑擒文三峽倒) 오대아치백요경(烏臺峨豸百僚驚)


-간방의 산(艮嶽: 조선의 산)이, 남쪽으로 돌아와서(南回),
맑고 깨끗한 정기를 모으니(鍾淑精),
많은 영웅(群英)이 배출(輩出)되어,
나아가 높이 벼슬에 오르지만(遷鶯),
학덕이 높고 명망이 뛰어나고(靑雲), 기량과 기예(器業)에 있어서
그대의 재능이 으뜸이며(君能最),
황(黃: 해월)이, 가장 지혜가 빼어난 사람(甲才)으로 이름이 나 있는데,
어느 누가 그대와 겨루겠는가!
예문관(翰苑)에서, (그대의) 사로잡는 문장(擒文)은
삼협(峽倒: 양자강 중류의 커다란 세 협곡)을 무너지게 하고,
사헌부(烏臺)의 위의가 당당한 관리(峨豸)로서,
모든 벼슬아치들이 두려워 하도다(百僚驚). -


라고 하였는데 이만 하면 당시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께서
해월(海月) 선생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 것이다.

 

 

또한 한국대표(韓國代表) 야담사화(野談史話: 洪曉民 篇)를 보면,

『선조조(宣祖朝) 시대에 이산해(李山海)라는 분이 있었다. 그의 자(字)는 여수(汝受)요 호는 아계(鵝溪)다. 그의 아버지는 지번(之蕃)이요, 그의 작은 아버지는 이지함(李之菡)으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하는 분이다. 말하자면 이산해라는 분은 이토정의 조카였던 것이다. 이산해는 마침 당년(當年)한 딸이 있어 그의 작은 아버지 되는 토정에게 사위감을 부탁하였다. 이토정은 이 때에 풍수설 이라던지 관상과 사주등 막힐 것이 없어 사위감을 부탁한 것이다.
이토정은 그의 조카에게 부탁받고 사위감을 고르러 다니는 판이었다. 하루는 종로의 큰 길거리로 시골서 서울로 올라오는 이사바리가 있었다.
그 이사바리 위에는 한 젊은 소동(小童)이 앉아 있는데 이 아이가 얼굴이 잘생기어 일견(一見)에 재상(宰相)감이었다.
이토정은 이사바리를 좇아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니 이 집은 그 때에 행세하는 양반의 집이요 그 집의 사랑채에 시골서 먼촌 일가되는 사람이 와서 드는 판이었다. 이토정은 우선 시골서 올라온 사람과 인사를 청하니 그는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으로, 일찍이 지사를 지내다 낙향하였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을 물으니 이덕형(李德馨)이라는 소년이었다. 이에 그 때에는 높은 재상으로 있는 이산해의 딸이 당년하여 사위를 고르는 판이니 그 집과 혼인(婚姻)함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민성(李民聖)이라는 분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요 워낙 궁한 판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살 수가 없어서 시골로 내려갔다가 시골서도 살 수가 없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그리 넉넉지도 못한 어느 일가집의 사랑채를 하나 얻어 드는, 바로 그날에 난데없이 청혼이 들어온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이지사는 이와 같이 적빈여세(赤貧如洗)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역시 이토정도 약간 대답이 나가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일이 아니오 자기의 조카의 일이니만큼 문지(門地)나 재산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다. 이토정(李土亭)은 우선 혼담(婚談)만은 어름어름 걸쳐놓고 한다름으로 자기의 조카에게로 왔다. 이공은 자기 작은아버지의 말을 듣고 문지나 재산이 없는 것을 알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토정(李土亭)은 그 소년을 한 번 보아나 달라고 하였다.
이산해는 이 말을 듣고 이덕형(李德馨)이란 소년을 가 보았다. 가서 보니 소년의 얼굴이 과연 동탕하고 잘 생기었다. 이에 이토정의 지인지감에 감탄하여 문지나 재산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모든 비용을 들여서 혼인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렇게 남녀간엔 인물도 잘 나고 볼 것이다. 이덕형 소년이 이 때에 누구나 보고 잘 생긴 소년이라고 하게끔 되어 드디어 이산해는 이 소년을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고도 의아하여 이토정에게 묻기를, 이소년이 나중에 어찌되겠느냐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소년이 나중에 벼슬이 어느 정도 가며 국가의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되겠느냐고 하는 물음이다.
이토정은 서슴지 않고 네 나이보다 먼저 정승을 할 것이다. 하고 한마디의 언질을 주었다.

 

과연 이소년은 속히 진사와 문과장원을 거치어, 삼십일세에 대제학(大提學, 1591, 선조 24년)이 되고

삼십팔세에 영의정(領議政, 1602, 선조 35년)이라는 놀라운 영달을 하였다.

이분이 곧 누구냐 하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막역지우(莫逆之友)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 (명종 16)∼1613(광해군 5))이었던 것이다. 이 두 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가장 그 난국을 잘 담당한 사람으로 이름난 공신(功臣)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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