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沙溪) 이영발(李英發)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사계(沙溪) 이영발(李英發)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근차 해월헌운(謹次 海月軒韻)
추봉차 해월헌(追奉次 海月軒) 아계상공운( 鵝溪相公韻)
사계(沙溪) 이영발(李英發)
망망창해불생조 (茫茫蒼海不生潮)
교교은섬전벽료 (皎皎銀蟾轉碧寥)
옥우앙관천묘묘 (玉宇仰觀天渺渺)
영주요망낭초초 (瀛洲遙望浪迢迢)
개준흡사요지연 (開樽恰似瑤池宴)
취적혼여적벽소 (吹笛渾如赤壁簫)
취후빙란의일곡 (醉後憑欄欹一曲)
차신의재광한교 (此身疑在廣寒橋)
망망한 푸른 바다(蒼海)에 조수(潮水)가 일지 않으니
밝은 둥근 달이 푸른 융단에 앉아 있네
옥황상제 대궐(玉宇)을 쳐다보니 하늘은 끝이 없고
영주 (瀛洲 ; 삼신산의 하나)를 바라보니 물결 멀리 아득하다
달에 비친 술 항아리를 여니 요지연(瑤池宴)과 흡사하고
흐느끼는 피리 소리 적벽강의 퉁소(赤壁簫) 소리 아닌가
난간에 기대앉아 한 곡조 불러 보니
이 몸 있는 곳이 신선의 궁정(廣寒橋)인가 하여라
사계(沙溪) 이영발(李英發)선생
명문가에서 태어나 영동과 영서의 시회를 휩쓸다 |
사계당 이영발은 1603년(선조 36)에 사동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사계당의 가계는 조선조 중기 이후 대를 이어 당상관 벼슬을 하는 명문가였다. 특히 그의 9대조인 효정공 이탁간(孝靖公 李卓幹)의 둘째 아들 이사관(李士寬) 대에 와서 전의이씨 가문은 조선조의 명문반열에 뛰어오르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사관(李士寬)은 고려 우왕 때 태어나서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을 추증 받는다. 그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2남인 이지장(李智長)의 아들 이덕량(李德良)이 세조·예종·성종 대에 걸쳐 무관으로 급제하여 하동현감을 지냈다. 황보인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이루지 못하고 여주에 은거한다. 3남인 예장(禮長)은 143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수관의 5남인 성장(誠長)의 아들인 수남(壽南)은 17세에 진사시, 20세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전의이씨 문중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대제학 이덕수(大提學 李德壽)도 이탁간의 현 손이며, 당대의 뛰어난 명필가인 이제신(李濟臣)은 이탁간의 6세손이다. 문의공(文義公)파에서는 그의 증손인 귀(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탁(李鐸)과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이 대표적이다. 명문가의 긍지를 갖고 태어난 이영발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영동과 영서의 시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는 등 글재주를 발휘하였다. |
‘충효전가’의 가훈을 실천하다 |
그러나 그는 과거급제에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묘갈명을 쓴 생원 남대만은 그의 이런 성격을 “일찍이 영서의 향내에 가서 일거에 장원을 하였는데, 곧바로 후회하기를 ‘관동이 험하기를 촉도의 구절양장보다 심하거늘 어떻게 부모의 유체를 조심하라는 옛사람들의 경고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하면서 다시는 과거의 뜻을 버리고 사동에 집을 짓고 사계정사라 현판했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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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가족이야기 |
사계당 이영발은 전의이씨 양간공파의 후손이다. 전의이씨의 시조 도(棹)는 고려 태조의 삼국 통일을 도와 이등공신에 녹훈되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使)에 오르고 전산후(全山侯)를 받은 충신이다. 그의 11세손인 정간(貞幹)은 조선 세종조에 뛰어난 효자로서 자헌대부중추원사(資憲大夫中樞院使)를 지냈다. 송천서원(松川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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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 만은(晩隱) 전선(田銑), 명은(明隱) 남유주(南有柱), 매헌(梅軒) 장온(張蘊),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 주경안(朱景顔) |
학문이야기 |
사계 이영발 학문의 특징은 ‘충효’를 실천하기 위한 생활학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울진·평해지방은 뚜렷한 학문적 흐름이 정착한 시기가 아니라, 몇몇 뛰어난 문사를 중심으로 학문의 체계화가 갓 시작되는 시기였다. 울진지방은 만휴 임유후, 우와 전구원, 서파 오도일, 만은 전선, 우암 윤시형, 남유주 등을 중심으로 율곡과 우암의 영향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평해는 해월 황여일의 영향으로 퇴계의 학풍이 강했다. 그러나 이영발은 사계당을 중심으로 울진과 평해 지방의 문사들과 두루 교유하면서 두 지역의 학문교류를 연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한 듯하다. 당시 이영발이 교유했던 문사들은 우암 윤시형, 만은 전선, 남유주, 장온, 이우당 주개신, 지평 주경안 등이다. |
저작이야기 |
그의 문집은 1844년경에 그의 9세손인 수권(壽權)이 엮어 세상에 선을 보였다. 그의 문집은 시와 부(賦), 제문과 부록으로 편집하였다. 110편의 시와, 1편의 부, 1편의 제문을 싣고, 부록으로 묘갈명과 만사 등을 실었다. 그의 묘갈명은 후학인 생원 남대만(南大萬)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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